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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南相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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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02년 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7년 군대해산 당시(軍隊解散當時) 시위 보병(侍衛步兵) 제 1연대(聯隊) 제 1대대소속(大隊所屬) 장교(將校)로서 대대장(大隊長) 박승환(朴昇煥)자살(自殺)하자 전대대(全大隊)인솔(引率)하고 서울 서소문(西小門)남대문(南大門) 사이에서 1일간 왜병(倭兵)시가전(市街戰)전개(展開)하여 용감(勇敢)히 싸우다가 전사(戰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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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남상덕은 의령(宜寧)사람으로서 남철희(南哲熙)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군부(軍部) 시위대 보병(侍衛隊 步兵) 제2연대 제1대대에 입대하여 견습 보병 참위(參尉)가 되었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이어서 군부대신(軍部大臣) 이병무(李秉武)가 일제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맺고서 군대해산을 명하자 참령(參領) 박승환(朴昇煥)이 순국하였다. 남상덕은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비분(悲憤)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8월 1일 군중(軍中)에 명하여 말하기를, ""장군이 나라를 위하여 돌아가셨으니 내 어찌 홀로 살기를 바라리오. 마땅히 적과 더불어 죽음을 걸고 결전하여 위로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하였다. 이어서 남상덕은 "함께 싸울 자 누구인가"하고 물으니, 부하 천여 명이 각기 총칼을 지니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 적을 치고자 하는데 갑자기 일병(日兵)이 남대문(南大門) 위에서 성벽에 의지하여 총을 난사하였다. 남상덕은 그들을 맞아 물리쳐 수많은 일병이 죽었다. 적장 미원(梶原)도 아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미원은 적의 효장(梟將)으로서 일찍이 만주의 전역(戰役)에서 누차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아군의 피해 역시 적지 않았으니 병졸 98명, 장교 7명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적장이 죽자, 적병은 크게 놀라 많은 후원부대를 증파하였다. 남상덕은 칼을 뽑아 들고 빨리 총격을 가하라고 명하였으나 아군의 탄환이 바닥나고 말았다. 혼란한 틈에 남상덕은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나머지 군진들은 해산 당하고 흩어졌으나 후에 각기 정미의병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 121면
  • 매천야록 42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6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상덕 - 경남 의령 -
본문
1881년 경남 의령(宜寧)에서 남철희(南哲熙)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일찍이 한국군에 입대하여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졸업하고 견습육군보병참위(見習陸軍步兵參尉)로 임관(任官)하여 시위 보병(侍衛步兵) 제2연대 1대대에서 근무하였다. 서울에 주둔한 시위대는 2개 연대이고, 각 연대는 3개 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1개 대대 병력은 장교 21명, 사병 591명의 규모였다. 그런데 1907년 8월 1일 새벽 7시에 한국군 해산 조칙(詔勅)이 발표되었다. 발표는 시위 각 부대장들을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에 불러 모아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가 낭독하는 형식이었다. 사령관 관저에 참여했던 각 부대장들은 각 부대로 돌아가 중대장에게 해산조칙을 전달하고 병사들의 총기를 반납시키고, 맨손으로 무예를 연습한다는 구실을 붙여 오전 10시까지 훈련원(訓練院)에 도착하도록 명령하였다. 해산식장으로 마련된 훈련원에는 이미 일본군 참모장 무다(牟田)와 군부고문 노즈(野津鎭武) 및 한국군 고위 간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 종로와 덕수궁 대한문(大漢門)을 비롯한 주요한 곳에는 일본군이 기관총을 설치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해산식에 참여할 시위대는 무장 해제된 채 거리를 행진하여 도착하도록 되어 있었다. 9시 10분 경 서소문(西小門) 쪽 병영과 서대문 쪽에서 돌연 총성이 울렸다. 시위 제1연대 1대대와 제2연대 1대대의 장병들이 훈련원으로의 동원을 거부하고 무기고 및 탄약고를 점령하여 항거한 것이었다. 군대해산에 반대한 병사들이 불참함으로써 12시 10분이 되어도 훈련원에 도착한 병사는 전체 병사 3,441명 중 600명에 지나지 않았다. 군대해산을 가장 먼저 거부하고 나선 것은 시위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參領)이었다. 군대해산에 분개한 그는 중대장들을 불러놓고 중대의 모든 사병들의 무기를 반납토록 하고 병사들 전원을 대대 연병장(練兵場)에 집합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대대장실로 들어가 통탄을 하면서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무기를 반납한 병사들은 연병장에 모여 정렬하였다. 그런데 대대장실에서 총성이 울렸다. 대대장이 자결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병사들은 대열을 벗어나 무기고로 달려가 총기와 탄약으로 무장하고 무장해제를 감시하러 온 일본인 교관 구리하라(栗原) 대위와 기병(騎兵) 2명을 향해 공격을 하였다. 구리하라 등은 당황하여 도주하였다. 이때가 아침 8시 경이었다. 이 무렵 연병장에 정렬한 제2연대 1대대 병사들을 인솔하여 훈련원으로 이동하려고 준비중이었다. 그 때 병영을 완전 장악한 제1연대 1대대 병사 가운데서 3명이 제2연대 1대대로 달려와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 소식을 외치면서 함께 일어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장군(박승환)이 나라를 위하여 죽었으니 내 어찌 홀로 살 수 있겠는가. 마땅히 적과 더불어 죽음을 걸고 결전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하고 항쟁의 결의를 보였다. 이어서 “박공(朴公)과 함께 죽을 사람이 누구냐 라고 큰 소리로 외치니, 모든 장병들이 일제히 죽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병사들을 무장시키고 병영을 장악한 후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중대장 서리 민중식(閔仲植)은 일본인 교관 이케(池) 대위와 함께 남문으로 도망쳤다. 마침내 서울 시위대는 제1연대 1대대 및 제2연대 1대대를 중심으로 군대해산에 반대하는 대일항쟁에 나섰다. 시위대는 곧바로 일본군의 반격을 받았다. 당시 반격에 나선 일본군은 제13사단 소속 보병 제51연대 3대대의 제9중대와 제10중대였다. 일본군은 각 중대의 1개 소대로 시위연대 각 1개 대대씩을 맡아 공격하였다. 일본군 제10중대 1개 소대의 공격을 받자 칼을 빼어 들고 시위 제2연대 1대대 병사들을 용감하게 지휘하여 항전하였다. 비로소 소대 병력으로서 대대병력을 상대하기가 어려웠던 일본군은 다급하게 본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다. 일본군 지원부대가 도착하자 일본군 제3대대장 사카베(坂部) 소좌(少佐)는 고전하고 있던 제9중대를 지원하여 시위 제2연대 1대대에 대한 총공격을 명령하였다. 오전 10시 40분 일본군 제12중대장 가지하라(梶原義久) 대위의 증원부대에 힘을 얻은 일본군은 시위 제2연대 1대대의 병영을 3면으로 포위하고 필사적으로 공격해 왔다. 제2연대 1대대 병사들은 동요하지 않고 주위 병영으로부터 집중 사격을 퍼부어 많은 일본군들을 쓰러뜨리고 부상을 입혔다. 가지하라 대위도 이때 쓰러졌다. 가지하라는 러일전쟁 때 만주에서 용맹을 떨친 맹장이었다. 그렇지만 병영 건물 곳곳에서 사격하는 제2연대 1대대 병사들의 집중 공격을 받아 가장 많은 부상자를 내고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 가지하라 대위가 죽자 일본군은 당황하여 군대를 더욱 증원하였다. 그런데 제2연대 1대대 병사들이 소유하고 있던 탄환이 바닥나고 있었다. 더구나 일본군의 폭탄이 병영 안에 떨어졌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일본군이 쏟아져 들어왔다. 시위대 병사들은 병영 밖으로 나와 일본군과 격렬한 백병전을 벌였다. 이처럼 시위 제2연대 1대대 병사들을 이끌고 우세한 무기와 증원된 병력으로 반격해 오는 일본군의 공격에 대항하여 오전 8시부터 약 3시간 동안 병영을 지켰다. 그렇지만 탄환과 무기의 부족으로 10시 50분경 일본군에게 병영을 빼앗기고 그 과정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 때 나이 27세였다. 시위대 가운데서 제2연대 1대대가 가장 용감했다. 제2연대 제1대대의 전투 속에는 그의 ‘충의와 지략’이 깃들어 있었고, 병사들도 감탄하며 따랐다. 화력이 월등하게 우세했던 일본군에 비해 무기와 탄약의 열세 속에서도 몰려드는 일본군을 맞아 백병전까지 벌였던 사실은 그 용감성을 말해 주고 있다. 시위 제1연대 1대대와 제2연대 1대대의 항전으로 해산 식장인 훈련원에는 해산 대상 시위대 병사의 약 52%에 해당하는 1,800명이 모이는데 그쳤다. 해산식도 오후 2시가 넘어서야 겨우 시작되어 3시에 끝났다. 해산식을 마친 병사들은 계급과 근무 기간에 따라 80원에서 25원의 ‘은사금(恩賜金)’이란 것을 지급 받았다. 해산당한 군인들은 분노에 떨었고, 일부 병사들은 돈을 찢어 버리고 통곡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시위대에서 가장 용감했던 제2연대 1대대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제2연대 1대대가 중심이 되었던 해산군인의 항쟁은 한말 후기의병의 시작이 되었고, 의병운동을 국민적 전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한제국을 지키는 마지막 불꽃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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