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평남 (平南) 평양 (平壤) 에서 남편 김예진 (金禮鎭) 이 계획한 평양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직접 제작하였고, 동년 (同年) 11월 중국 (中國) 상해 (上海) 로 망명하는 남편을 도와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함.
1920년대한민국임시정부원 (大韓民國臨時政府員) 에게 은닉처를 제공하였고, 동년 (同年) 8월 남편 김예진 (金禮鎭) 이 참여한 평남도청 폭탄 투척에 사용할 폭탄을 직접 운반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1922년 중국 (中國) 상해 (上海) 에서 조선 유학생들을 돌보며 기독교여자절제회 활동을 함.
1925년중국 (中國) 상해 (上海) 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에 인구세 (人口稅) 를 납부하였고, 1926년 평남도청 폭탄투척 사건으로 체포된 남편 김예진 (金禮鎭) 의 석방을 위해 평남 (平南) 평양 (平壤) 으로 돌아와 구호 활동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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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925년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9년 2월 평안남도 평양에서 남편 김예진이 계획한 평양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직접 제작하였다. 11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는 남편을 도와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에게 은닉처를 제공했다. 8월 김예진이 참여한 평안남도 도청 폭탄 투척에 사용할 폭탄을 직접 옮겼다. 1922년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 유학생들을 돌보며 기독교여자절제회를 조직하고 상하이 한인들의 생활개선과 독립의식 고취활동을 전개해 갔다.
아울러 1925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인구세(人口稅)를 납부하였다. 1926년 평안남도 도청 폭탄투척 사건으로 체포된 남편의 석방을 위해 평양으로 돌아와 구호 활동을 하였다.
1928년 12월 2일 김예진의 석방 이후 7년 간 작은 시골교회를 7번이나 옮기며 목회 활동을 펼쳤다. 이때 일본 당국의 탄압과 극도의 빈곤으로 갖은 고초를 당하였다. 이 또한 일본 관헌에 의해 수차례의 예비 검속을 당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신문(獨立新聞)(1925. 10. 21)
- 조선일보(朝鮮日報)(1926. 5. 23, 1927. 12. 15)
- 중외일보(中外日報)(1927. 8. 12)
- 나라사랑의 가시밭길에(한도신, 2010)
- 꿈갓흔 옛날 피앞흔 니야기(한도신 기록, 김동수·오연호 정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