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41년 8월 일본 대판(大阪)에 소재한 대판공학교(大阪工學校)에 재학하면서 대판시 북구(北區)의 신문배달원 민춘기(閔春基)를 만나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민족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근대정치사』,『삼민주의(三民主義)』등 민족운동 관련서적을 탐독하면서 중국혁명의 대부 손문(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착안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한국의 삼천만 민중을 자각·분기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1942년 8월 동 신문점에 최문전(崔文典)이 고용되자 그를 동지로 가담시키고 9월 앵궁공원에서 회합하여 "한국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중략) 한국 청년층의 의식 선봉분자를 결집하여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가 될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내외에서 조국 독립에 정진하고 있는 동지, 그 중에서도 만주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과 연락하고 일본이 대동아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있는 호기를 놓치지 말고, 한국 민중으로 하여금 독립혁명투쟁에 궐기시켜 일거에 목적을 완수해야 한다"는 근본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동지 획득과 동포에 대한 지도 계몽을 당면 목표로 설정한 그는 대판지역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세계 정세와 한국통치문제를 설파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1942년 8월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붙잡혔던 서산옥제(西山玉濟)와 연락하고 9월 상순 동인과 대판에서 회합하여 비밀리에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인 비밀결사를 조직하려다 발각되어 10월 20일 일경에 붙잡혔다.
1943년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2월 10일 형기가 종료되어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소화특고탄압사(명석박륭) 하권 52∼5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1343∼1345면
- 재소증명서(대판형무소, 1995.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