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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1479
성명
한자 金成淑
이명 金成璹, 金成璹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5 훈격 건국포장
1919년 3월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면소(免訴)처분을 받았으며 1926년 7월 도일(渡日) 유학 중 협동조합운동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후 중앙집행위원장(中央執行委員長)등을 역임하였고 신간회 선전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1월 학생만세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다시 1931년 7월에 만보산 격문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48일만에 석방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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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19년 3월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4학년 재학 중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퇴학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1920년 제주도로 귀향하여 신유의숙(辛酉義塾)을 설립하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활동에 힘쓰다가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하였다. 일본유학 중이던 1926년 7월 조선민중의 구제(救濟)를 목표로 한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의 발기인으로 참가한 이후 귀국 후에도 동 단체의 활동에 주력하여 1929년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대 초반에는 협동조합운동사 활동의 실천방향에 대하여 신문과 잡지에 다수의 글을 게재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1929년 동 회의 선전부(宣傳部)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0년 1월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1년 7월 중국에서 발생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관련하여 이 사건을 널리 알리고 일제를 규탄하고자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8일 동안 구금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제15권 3∼4면, 제16권 282면
  • 濟州敎育通史(濟州道敎育硏究院, 1974) 112면
  • 조선신경제건설 3개년 계획(三千里 제3권 제10호, 1931. 10. 1)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19. 8. 30)
  • 朝鮮日報(1926. 7. 2, 1927. 6. 7, 1929. 4. 7·4. 12·4. 16, 1931. 7. 16)
  • 東亞日報(1928. 4. 4, 1929. 4. 16, 1931. 8. 23, 1932. 1. 24·1. 25, 1933. 1. 1)
  • 協同組合運動社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 개최에 관한 건(京鍾警高秘 제5800호, 1929. 5. 4), 思想問題에 관한 조사서류(7)
  • 경리조합 발기인회에 관한 건(京鍾警高秘 제6255호, 1929. 5. 13), 思想問題에 관한 조사서류(7)
  • 中外日報(1930. 2. 8)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성숙 김성수(金成璹) 전라남도 제주 대정(大靜) 3.1.운동, 협동조합운동사 활동, 광주학생운동, 만보산 사건
본문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대정면(大靜面) 가파도(加波島)에서 출생하여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에 진학하였다. 4학년 재학 중 일어난 3·1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었으나, 1919년 8월 30일 면소(免訴) 방면되었다. 붙잡힌 뒤 진행된 신문 내용을 보면 일찍부터 한국이 독립하기를 희망하던 차라 이번에 일어난 독립운동에 기쁘게 찬성하고 있으며 이후 독립운동이 다시 일어나면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또한 학교 제도의 불완전성, 일본인과 한국인 간의 차별 대우를 지적하였으며 한국의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를 해결하려면 독립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피력하였다. 제주도에 귀향해 가파리에 있는 신유학교(辛酉學校)의 교장으로 재직하며 교육에 힘쓰다가 일본 와세다(早稲田)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일본 유학 도중 1926년 5월 조직된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의 창립위원으로 서무부서를 담당하였다. 한국에서 협동조합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3·1운동 이후로 경제적 단결을 목표로 한 소비조합의 결성이 그 시초였다. 그러나 대체로 1~2년 내로 해체되었으며 1920년대 후반 이후 다시금 대두되었다. 협동조합운동사는 일제강점기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 YMCA와 함께 3대 협동조합운동 단체 중 하나로 일본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운동이다. 이들은 한국 경제의 파탄과 그 극복에 대해 다양한 논의를 한 뒤 한국을 이식 자본주의 사회로 정의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인 전체가 무산자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소작농과 노동자뿐 아니라 자작농과 도시 소시민, 대·소상공업자까지 몰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운동은 협동조합운동 밖에 없다고 보았다. 즉, 협동조합을 구축하여 경제적 단결, 자주적 훈련을 목표로 하였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만들어지자 신간회 도쿄지회에서 활동하였다. 귀국한 후에는 신간회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협동조합운동사의 활동을 계속하여 1929년 협동조합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신문·잡지를 통해 협동조합운동사의 실천 방향에 대한 글을 지속해서 게재하였다. 1930년에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배후 세력으로 체포되었다가 불기소되었다. 1931년 7월 2일 발생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당시 반제격문(反帝檄文)을 배포한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48일 만인 8월 22일에 석방되었다. 광복 이후 1957년 결성된 민주혁신당(民主革新黨) 부위원장(副委員長)을 역임하였고 1960년에는 제5대 국회의원(남제주군 : 서귀포시 일원)에 당선되었다. 1967년에는 통일사회당(統一社會黨)의 대표위원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면소 방면 경성지방법원 1919-08-30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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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2 사당 창열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3 기념관 제주항일 기념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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