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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1070
성명
한자 金昌漢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5 훈격 건국포장
1927년 전북(全北) 남원(南原)에서 신간회(新幹會) 남원지회(南原支會)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남원청년동맹(南原靑年同盟)부위원장(副委員長), 1928년 남원노동조합(南原勞動組合) 쟁의부장(爭議部長)과 1931년 2월 신수암(申守岩)과 함께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조직(組織)하여 남원 지역(南原地域) 책임을 맡았으며, 1932년 고용계(雇傭稧)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33년 일경(日警)에게 체포(逮捕)되어 징역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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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신간회(新幹會)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1927년 신간회 남원지회(南原支會) 설립에 앞장 섰으며, 남원청년동맹(南原靑年同盟) 부위원장, 1928년 남원노동조합(南原勞動組合) 쟁의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대중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대중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통해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깊이 자각하여 사회주의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해갔다. 1931년 2월 신수암(申守岩) 등과 함께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을 조직하여 남원지역 책임을 맡았으며, 소작료 감하운동과 지세지주부담 등을 결의한 후 농민교양 문제와 동지 규합에 힘을 쏟았다.

1932년 고용계(雇傭契)를 조직하고, 남원읍(南原邑) 죽항리(竹巷里) 김현준(金絃濬)의 집에서 고용인들을 모아 놓고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노동임금 인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를 사용자측이 거부하면 동맹파업을 결행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1933년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東亞日報(1927. 10. 10, 1932. 7. 14, 1933. 2. 20·12. 1, 1934. 10. 11)
  • 朝鮮日報(1929. 2. 17, 1933. 12 14, 1934. 8. 10)
  • 判決文(全州地方法院, 1934. 10. 15)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判決文(大邱覆審法院, 1935. 2. 14)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566면, 제11권 15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창한 - 전라북도 남원(南原) 남원고용계 사건, 남원독서회 사건
본문
1905년 8월 23일 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 남원읍(南原邑) 죽항리(竹巷里)에서 태어났다. 1927년 3월 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해 가을 신간회(新幹會) 남원지회에 가입하였고, 동시에 남원청년동맹회(南原靑年同盟會)에도 가입하여 부위원장을 맡았다.1928년 남원노동조합(南原勞動組合) 쟁의부장을 맡으면서 사상운동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자각하고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해갔다.1931년 가을에는 양홍주(梁鴻柱)·형광욱(邢光旭)·윤철호(尹喆鎬) 등과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을 조직하고, 책임자로 추대되었다. 양홍주는 소년부(少年部), 윤철호는 남원군 동면(東面) 및 운봉면(雲峰面) 일대, 형광욱은 북면(北面) 일대를 담당하였다. 이후 소작료 인하운동, 지세의 지주 부담, 농민교육 등의 방법을 통해 동지를 규합하면서 활동을 펼쳐나갔다.1931년 12월 정읍청년동맹(井邑靑年同盟) 집행위원장이자, 신간회 정읍지부(井邑支部) 서기장을 역임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순창군(淳昌郡) 청년동맹의 조직선전부장으로 활동하던 신수암(申守岩)과 만나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 혁명을 실현하기 위한 방책을 상의하였다. 그리하여 남원군과 순창군의 청소년을 교육시켜 이들을 기초로 경제투쟁 방법을 통해 일제에 저항키로 하였다. 나아가 이와 같은 경제투쟁을 바탕으로 좌익노동농민조합(左翼勞動農民組合)이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기 위해 남원군의 책임자가 되어 독립운동을 지도 및 통제하기로 합의하였다. 신수암은 순창군의 책임자가 되었다.1932년 봄에는 김막동(金莫童)을 책임자로 하는 고용계(雇傭契)를 조직하고, 임금인상운동 전개를 지시하였다. 또한 양흥주를 책임자로 하는 점원조합(店員組合)과 신문배달조합을 조직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대신 남원군 사매면(巳梅面) 대신리(大新里)를 중심으로 이현수(李鉉壽)를 책임자로 하는 동창회를 조직하고, 독서회·토론회·야학 등을 두어 공산주의 사상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남원공립보통학교 교사인 조옥준(趙玉濬)은 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매달 12엔 정도의 자금을 보내주기도 하였다.1933년 1월 20일 전라북도 남원군 주천면(朱川面) 장안리(長安里)에서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 법성면(法聖面) 법성리(法聖里)에 사는 남궁현(南宮炫)과 만나 운동자금을 조달을 위해 남궁현이 사는 지역의 특산품인 석수어(石首魚)를 건조시켜 판매하여 발생하는 이익금을 충당키로 했다. 또 이익금을 공산주의 운동의 희생자들이나, 이로 인해 생활이 곤란한 사람들을 돕는 데에도 사용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한 단계 진전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석수어 건조사업의 공동경영을 협의하고, 사업자금으로 500엔을 출자하기로 했다.활발히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33년 전라북도 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던 적색농민조합운동과 공산당 재건운동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조직이 노출되어 붙잡혔다.1934년 10월 15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34년 11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미결구일수 중 180일 본형에 산입)되어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6년 6월 3일 출옥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180일 본형에 산입 전주지방법원형사부 1934-10-15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징역 2년 원심 미결구일수 중 180일 본형에 산입 대구복심법원 1934-11-30 국가기록원
3 판결문 치안유지법위반 면소(免訴) 전주지방법원 1935-10-28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 - -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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