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공주군(公州郡) 공주면(公州面) 공주시장(公州市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학생·졸업생·기독교인 등이 중심이 되어 계획되었다. 3월 24일 밤 9시 공주면 대화정(大和町) 영명학교 교실에서 교사 김관회(金寬會)·이규상(李圭商)·현언동(玄彦東), 졸업생 김사현(金士賢), 청산학원 학생 오익표(吳翼杓)·안성호(安聖鎬), 기독교회 목사 현석칠(玄錫七) 등이 모였다. 이들은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공감하고 4월 1일 오후 공주 장날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김관회는 3월 25일 같은 학교 조수 김수철(金洙喆)에게 계획을 설명하고, 학생 동원과 학생 윤봉균(尹鳳均)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 약 1,000매의 등사를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영명학교 학생인 강윤을 비롯한 유준석(柳俊錫)·노명우(盧明愚)·윤봉균 등은 3월 30일 김수철을 만났고, 이들과 함께 3월 31일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또 김수철은 이규남에게 대형 태극기 4개를 제작하게 하였다. 4월 1일 노명우·유준석 등은 선언서를 각각 100매 휴대하고, 강윤과 윤봉균·김수철 등은 태극기를 하나씩 들고 공주시장으로 나갔다. 시장에 도착한 이들은 오후 2시 군중에게 선언서를 살포하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신속한 제지로 만세운동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기까지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公州地方法院, 1919. 8. 29)
- 豫審終結決定書(公州地方法院, 1919. 7. 28)
- 永明(공주영명고등학교, 1990) 57-59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