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755
성명
한자 金彦洙
이명 金千日, 金光于日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2 훈격 애족장
보천교도(普天敎徒)였다가 1929년 무렵 삼성교(三聖敎)에 귀의하여 1942년 조선(朝鮮)독립(獨立)을 믿고 민족의식의 고취와 조직의 확장 등을 위해 노력하다가 1942년 경 체포되어 징역 4년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르다 가출옥(假出獄)하여 사망(死亡)사실(事實)확인(確認)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 옥고(獄苦) : 옥살이를 하는 고생.
  • 가출옥(假出獄) : 가석방의 전 용어, 형기가 끝나지 않은 죄수를 일정한 조건하에 미리 풀어주는 것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그는 보천교(普天敎)신자였으며 일제의 종교말살정책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일대를 오가며 동지규합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1940년 5월 10일(음 4월 4일) 전라북도 정읍군 덕천면 신원리 황하용의 집에서 증산교와 시천교를 통합한 삼성교(三聖敎)에 가입하였다. 삼성교는 교도 12,000명을 모집하면 이들이 신통력을 발휘해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하였고, 그는 1942년 2월 21일 조선이 독립될 것이며 이를 위해 삼성교도 12,000명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는 1940년 5월 11일 오전 종교의식을 갖고 그의 지도하에 조선독립건국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신종교단을 결성하며 이것으로 조선을 일본제국주의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42년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高等法院藏版 高等法院判決錄(司法協會, 1943.12) 第29卷 1942年度 246∼250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別集 3卷 65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언수 김천일(金千日) 전라북도 정읍(井邑) -
본문
1894년 8월 8일 전라북도 정읍군(井邑郡) 입석면(笠岩面) 마석리(磨石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천일(金千日)이다. 1909년 증산교(甑山敎)를 개창한 강일순(姜一淳)이 사망하자, 차경석(車京錫)은 증산교를 개창하여 보천교(普天敎)를 조직하였다. 그는 1915년 보천교에 입교한 뒤, 차경석의 신임을 받았던 고위 간부 채경대(蔡京大)와 함께 활동하였다. 1923년경 채경대가 차경석과 갈등을 빚으며 14명의 교인과 함께 보천교를 이탈하자, 함께 보천교를 탈퇴하였다. 1924년 4월경 채경대가 강일순의 출생지인 전북 정읍군 덕천면(德川面) 신월리(新月里)에 증산사당(甑山祠堂)을 짓고 증산교(甑山敎)를 창설할 때, 4인방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채경대는 1930년 11월 19일 20여 명의 추종자와 함께 선도종장증산신성(仙道宗長甑山神聖), 불도종장진묵대사(佛道宗長震默大師), 유도종장회암선생(儒道宗長晦菴先生) 등의 삼성(三聖)을 받드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증산교는 1929년 무렵 약 982명의 신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1920년대 말에 이르러 정읍에 본부를 둔 보천교 내에서는 보수 세력과 혁신 세력 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보천교 간부들이 갈라져 나와 새로운 교단을 창설하였다. 이는 보천교인의 이탈로 이어지면서 1930년에 이르러 많은 보천교인이 증산교로 모여들어 교세는 6,000여 명으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1936년 5월에는 증산교를 인도교(人道敎)로 이름을 바꾸고 본부를 서울 종로로 옮겼다. 하지만 6월 12일 경찰로부터 해산 명령을 받았고 채경대를 비롯한 간부들이 구속되었다. 채경대는 출소한 후 신농사(神農社)를 조직하여 만주 펑톈성(奉天省)에 있는 박인촌(博仁村)으로 신도들을 집단 이주시켜 신농농장(神農農場)을 세웠고, 퉁화성 류허현 다뎬즈촌(大甸子村) 부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교인촌을 건설하였다. 이때 만주를 오가며 채경대와 함께 활동하였다. 1939년 채경대가 다시 체포되어 1년 6월의 징역형을 받자, 그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독자적인 종교 개창에 나섰다. 창씨개명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금광천일(金光天日)로 고치고 5월 10일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황하룡(黃河龍)의 집에 11명의 추종자를 모아 놓고 최제우(崔濟愚)를 교조로 하는 시천교(侍天敎)와 강일순을 교조로 하는 증산교를 통합한 새로운 종교의 개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때 어떤 종교명을 내세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신도 1만 2,000여 명을 모아 병을 치료하는 신통력을 가진 도통군자(道通君子)로 만들어 곧 일본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이 멸망하려 할 때, 한국을 독립시켜 나라를 건설한 대공로자로 대우받게 해주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한국 독립의 날로는 1942년 (음)2월 21일, 즉 양력 4월 6일 한식날을 예언하였다. 교단을 이끌 지도부로는 6임(任)과 8봉(峯)을 설치하고 이를 관리하는 법사(法師), 사실상의 교주 자리에 올랐다. 다음 날인 5월 11일 새벽 1시경에는 법사와 6임, 8봉의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경찰의 탄압을 피하려고 헌금을 약값이라 부르는 등 암호를 사용하였으며 전도 활동을 친일 종교화된 시천교(侍天敎) 포교로 위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1941년 3월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다 가출옥하였으나 광복을 1년 앞두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징역4년 미결150일입 청진지방 1942-02-17 국사편찬위원회
2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4년( 미결구류150일 통산) 청진지방법원 1942-02-17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산골 유골을 화장하여 산이나 강, 바다 등에 흩뿌려 묘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언수(관리번호:960755)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