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20년대 초 서울에서 청년학관을 다닐 무렵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1924년 고향 제주로 내려가 사상단체인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하였다. 동회의 교육부 간사로 활동하면서 제주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신사상을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1925년 4월 전국적 사회주의단체인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에 참가하여 일제 식민통치로 인한 민족 모순, 계급모순 해결을 위한 사회주의운동에 전념하였다. 1926년에는 신인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여 청년동맹을 결성하는데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제주지회 조직에 힘썼으며, 동년 8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가입하여 제주도 야체이카 조직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경기도 검찰부에 넘겨져 2년여 동안 구금되어 고초를 치르다가 1930년 12월 22일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1월초 제주도로 돌아 온 그는 제주읍(濟州邑, 현재 제주시) 부태환(夫泰煥)의 집에서 제주지역 주요 사회주의자들과 '제주도사회주의운동자간담회'를 갖으며, 조직원을 확보하고 사회주의운동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리고 동년 5월에는 청년동맹(靑年同盟) 출신 신재홍(申才弘)·이익우(李益雨)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를 결성하고 그 책임자가 되었다. 제주야체이카는 사회 각 부면의 청년·여성·노동자그룹 등 제운동단체를 지도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며, 이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제주야체이카는 1931년 9월 세금불납운동, 강제묘목배포 반대투쟁 등을 지도했으며, 일제강점기 어업 노동자의 투쟁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인 1932년 1월 해녀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해 3월 일경에 체포된 그는 유치소에서 탈출한 후, 일본 오사카[大阪]로 피신하였다. 이후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한 그는 1939년 조선문제시국연구회(朝鮮問題時局硏究會)를 조직하고,『朝鮮新聞』의 발간을 지도하는 등 항일운동을 펼치다가 1943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1월 7일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大邱覆審法院, 1932. 10. 26)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30. 12. 22)
- 한국독립운동사사전(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제6권 321·323·326∼327면
- 濟州抗日獨立運動史(濟州道, 1996) 54·210·212·214·217·219∼220·223·229·231∼271·369·373∼374·490·500∼521·596∼599·605∼608·611∼618·622∼624·717·947·1137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1권 106∼107면
- 現代史資料(姜德相, 1972) 제29권 93·137·142면
- 判決文(高等法院, 1944. 3. 27)
- 東亞日報(1925. 3. 19·10. 1, 1932. 12. 14·12. 16·12. 25, 1933. 2. 8)
- 朝鮮日報(1933. 2. 8)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 2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