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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036
성명
한자 姜日求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9 훈격 건국포장
1931년 10월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구룡면(九龍面)에서 이호철(李戶喆) 등과 함께 사회과학(社會科學)관련 비밀연구모임을 조직하여 교양부(敎養部)를 담당하고 1933년 4월 중순 칠모회(七侔會)를 조직하여 야학운영 및 신사상 보급과 관련한 모임을 지속하였으며 동년(同年) 5월 이후 동군(同郡) 장암면(場岩面)의 야학담당자로서 농민계몽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執行猶豫) 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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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1931년 10월 충남 부여군(扶餘郡) 구룡면(九龍面)에서 이호철(李戶喆) 등과 함께 비밀연구모임을 조직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강일구는 부여공립보통학교(扶餘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만주와 일본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1931년 8월 귀향하였다. 이후 최재봉(崔在鳳)이 경영하는 조선일보(朝鮮日報) 부여지국에서 일하면서 동리의 야학교 교사를 겸임하였다. 이 무렵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깊게 인식하고 항일투쟁의 수단으로 사회과학 서적을 구독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접근하였다. 강일구는 1931년 10월 5일 구룡면 금사리(錦寺里) 산중에서 동지들과 함께 공산주의연구협의회(共産主義硏究協議會)를 결성하고 교양부를 담당하였다. 이후 1933년 3월 23일 보다 적극적인 운동실천을 위해 동회를 해체하고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를 결성하고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여 연극, 강연 등을 개최해서 농민의 계몽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동년 4월 중순경에는 칠모회(七모會)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야학운영과 사회주의 사상 보급에도 힘썼다. 동년 5월 부여군 장암면(場岩面)의 야학담당자로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강일구는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共産主義硏究協議會, 共産主義者協議會, 農民俱樂部 및 七會모사건(1936. 3) 思想彙報 제6호 216~217, 219~220면
  • 일제하 부여지역 동족마을의 농민운동연구(장세옥, 2002) 湖西史學 제33집 82면
  • 일제시기 충남 부여·논산군의 유지집단과 혁신청년집단(지수걸, 2005) 韓國文化 제36집 216면
  • 朝鮮中央日報(1935. 10. 16·11. 3)
  • 東亞日報(1933. 9. 29·12. 9)
  • 刑事事件簿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朝鮮日報(1935. 4. 30)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일구 - 충청남도 부여(扶餘) 부여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
본문
1910년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세도면(世道面) 청포리(菁浦里)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여공립보통학교(扶餘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에 진학하였으나 곧 중퇴하였다. 그 뒤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滿洲)·봉천(奉天) 등지에서 지내다가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고학을 목적으로 건너갔고 다시 부여로 돌아왔다. 1931년 10월 구룡면(九龍面) 금사리(金寺里)에서 공산주의연구협의회(共産主義硏究協議會)가 이호철(李戶喆)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활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시월회(十月會)라는 이름을 표면적으로 사용키로 하고 부서별 책임자와 월례회를 결정하였는데 책임대표는 이호철, 서기는 노명우(盧明愚), 조사부는 장창선(張昌善), 평의원은 최재봉(崔在鳳)이었다. 여기서 공산주의 이론과 투쟁 방법을 연구하는 교양부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이 조직을 매개로 혁명적 농민조합 활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31년 11월 제1회 월례회를 끝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는데, 이호철이 북간도(北間島)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1년 뒤 귀국한 이호철은 1933년 3월 23일 실천적이고 지도적인 결사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여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를 결성하였다. 이와 함께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고 연극, 강연을 개최하여 농민을 사상적으로 교양하기로 하였다. 홍산면(鴻山面)은 이호철과 노명우, 규암면(窺岩面)은 노명우와 오기영(吳祺泳), 부여면(扶餘面)은 유기섭(柳基燮)과 오기영이 맡았고, 장암면(場岩面)을 최재봉과 함께 분담키로 한다. 이 결정에 따라 부여 장암면 장하리(長蝦里) 장정(長亭) 마을에 있는 장정야학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운영자 강성구(姜星求)는 평소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반대하며 부여 지역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약한 인물로, 정정야학은 사회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민중교육·문화운동을 펼치는 곳이었다. 교육 활동 외에 연극도 자주 공연하였는데 주요 내용은 일본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거나 만주로 싸우러 간다거나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야학 학생들을 가르칠 교과목과 교과 재료를 선정하고 협의하려고 위해 강병국(姜秉國)·강성모(姜聖模)·강주구(姜柱求)·강병욱(姜秉郁)·강병환(姜秉煥), 최재봉과 함께 칠모회(七眸會)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3년 9월 첫째 주 일요일 국제무산청년데이를 기하여 도쿄에서 다수의 전단이 전해지자 요시찰 인물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일어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활동이 발각된다. 이 사건은 부여 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 충남적색비사사건(忠南赤色秘社事件), 금강공산협의회사건(錦江共産協議會事件), 충남공산당사건(忠南共産黨事件), 부여공협사건(扶餘共協事件), 부여재건사건(扶餘再建事件), 농촌적화공작사건(農村赤化工作事件) 등으로 불리며 충남 지역의 중대한 사상 사건으로 대두되었다. 1933년 12월 7일 충남 경찰부와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수리된 인원은 54명이었고 12월 8일 16명이 예심에 회부되었다. 1935년 6월 12일 예심(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5년 형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11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동일한 구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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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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