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23년 12월 4월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면에서 지주의 무리한 소작료 징수를 막기 위해 암태소작인회가 결성되었고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4년 3~5월 고율의 소작료에 반대하여 소작쟁의 운동을 벌였다.
1924년 7월 암태도 소작인 600여 명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가서 소작쟁의로 구속된 박용산을 포함한 소작회 간부 및 소작인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같은 해 9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騷擾)·상해·주거침입·훼기(毁棄)’ 등의 혐의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1924년 12월에는 암태청년회 회의에서 교양부(敎養部)를 맡았다. 1925년 1월 암태소작회 서무부 구호(救護)를 맡았다. 1927년 3월 암태농민조합 5년차 제1회 정기총회에 참석하여 조선민족단일당조직 촉성 등을 결의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判決文)(광주지방법원:1924. 9. 18)
- 동아일보(東亞日報)(1923. 12. 11, 1924. 7. 13, 9. 11, 9. 14, 1925. 1. 10, 5. 14, 8. 15, 1926. 2. 1)
- 조선일보(朝鮮日報)(1924. 7. 18, 1927. 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