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작된 3.1운동이 고양군에서는 2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5일 이후 용강(龍江)·한지(漢芝)·독도(纛島)·지도(知道) 등지에서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독립만세를 이끌었다. 3월 23일에는 오후 8시부터 은평(恩平)·숭인(崇仁)·송포(松浦)·신도(神道)·용강 등 5개면의 10여 개의 마을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거나 산 위에 올라 횃불을 놓고 만세를 외쳤다.
은평면 녹번리(碌磻里)에서 오후 9시부터 11시까지 녹번고개(碌磻峴)를 중심으로 300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녹번현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출동해 26명을 체포하고 탄압하여 군중들은 해산했다. 신사리(新寺里)에서는 밤에 김윤정(金潤鼎)의 집 대문을 열고 여러 명이 들어와서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했다. 오후 11시경에는 마을 부근 일대에서 만세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일부 인사들은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방화할거다’라 소리쳤다.
한편 역촌리(驛村里)에서 약 40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연호하고 ‘독립만세에 참가하지 않으면 방화하겠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이에 문도치(文道致)도 집을 나와 군중에 합류했다. 이웃 마을 신사리 월암산에 횃불독립만세 소리를 듣고 문도치 등은 주민 약 20명과 함께 당제산(堂祭山)에 올라가 불을 놓고 만세를 외치는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호소회(扈所回)는 은평면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헌병에게 체포되어 경성헌병분대에 압송되었다. 1919년 4월 1일 헌병분대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 60도의 즉결처분을 받고 태형의 고초를 겪었다.
정부는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19. 5. 1)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1919. 6. 19)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19. 7. 31)
- 매일신보(每日申報)(1919. 3. 25)
- 범죄인명부(犯罪人名簿)(경성헌병분대:1919. 4. 1)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7)(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25보, 1919. 3. 24)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1)(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관한 건, 1919. 10. 2)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13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