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1844년 5월 19일(음력) 경북 영천군(永川郡) 자양면(紫陽面) 검단리(檢丹里, 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에서 아버지 정유완(鄭裕玩)과 어머니 순천이씨(順天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자는 좌겸(左兼), 호는 우석(愚石), 열남(洌南), 초명은 치우(致右), 치대(致大), 관직(寬直)이라 하였으나, 1901년 고종이 내려 준 자호(字號)와 이름으로 자를 백온(伯溫), 호를 동엄(東嚴), 이름을 환직(煥直)이라 하였다.
고려 중기 지주사(知奏事) 형양공(滎陽公) 정습명(鄭襲明)의 25세손이며, 임진왜란 때 영천성(永川城)을 탈환한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이다. 증조부 정하호(鄭夏濩)는 성균관 생원이었다.
1885년 12세에 향중(鄕中)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렇지만 의술을 익혀 명성을 얻었기에, 1887년 44세 때 형조판서 정낙용(鄭洛鎔)의 추천으로 태의원(太醫院) 전의(典醫) 벼슬에 올랐다. 벼슬길에 오르기 전까지는 집안이 가난하여 가족들은 영천, 금릉(金陵), 죽장(竹長)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충효동으로 돌아왔다. 그가 남긴 시 90여 수는 대부분 이러한 시기에 지은 글들이다.
태의원 전의로 벼슬에 오른 이듬해인 1888년, 의금부도사 겸 중추원의관(義禁府都事兼中樞院議官)으로 승진하였다. 1894년 2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으로 삼남지방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참여하였다.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완전사(翫戰使)에 임명되어 군무대신 조희연(趙羲淵)과 함께 두 나라의 전투 상황을 살펴보았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조선 정부를 위협하고 정치를 간섭하자,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은 이에 반대하여 다시 대일항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황해도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일본군이 나서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그는 「일병의뢰반대상소(日兵依賴反對上疏)」를 올려,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10월에는 자신이 선유사겸토포사(宣諭使兼討捕使)로 나서 황해도 구월산 일대의 동학군을 진정시켰다.
1895년 1월, 태의원 시종관(侍從官)으로 벼슬이 올랐다. 그 해 8월, 시찰사겸토포사(視察使兼討捕使)로 삼남지방을 돌아보던 중 경남 진주(晉州)에서 을미사변 소식을 들었다. 서울로 올라와 벼슬에서 물러난 뒤, 2년 동안 서강(西江)의 집에서 조용히 지냈다. 1896년에 접어들면서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백성들의 반일감정도 한층 높아졌다. 그는 의병에 대한 생각을 「여신대장방략론(與申大將方略論)」으로 내어 놓고, 아관파천에 대한 대응책으로 「기정부의석(寄政府議席)」을 정부에 제시하기도 하였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태의원별입시(太醫院別入侍)로 다시 시종관 벼슬에 올랐다. 1898년 「토역상소(討逆上疏)」를 올려 갑신정변 및 을미사변 관련자들을 엄격히 처벌할 것을 촉구하였다. 1899년 11월, 활빈당을 비롯한 ‘화적’이라 불리는 도적들이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자 삼남검찰겸토포사(三南檢察兼討捕使)로 삼남지방을 둘러보았다. 1900년 여름에는 원수부위임(元帥部委任)에 임명된 뒤, 삼남시찰사를 겸하여 삼남지방을 다시 돌아보았다. 또 그해 겨울 삼남도찰사(三南都察使)로 벼슬이 올라 여러 곳을 둘러보던 중,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쫓아내었다. 한편, 울산과 양산에서는 민원을 일으켜 구속된 적이 있으나 고종의 신임으로 풀려나 다시 시종신(侍從臣)의 자리에 올랐다.
1901년 11월 20일 밤 종묘에 불이 났다. 이 때 고종과 태자가 위험해지자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 공로로 이름과 자호(字號)를 하사받았다. 1902년 정치적으로 시급한 문제들을 지적하고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담은 「십조소(十條疏)」를 올렸다. 1904년에는 김옥균, 안경수, 우범선에 관한 『한성신문』의 기사에서 ‘역적들의 영혼이 서로 손을 잡고 기뻐한다’는 내용을 보고 ‘변파황탄설(辨破荒誕說)’을 발표하여 이를 비판하였다.
1905년 삼남도찰사(三南都察使)로서 호서 · 호남일대를 돌아보고 경상도 동래(東萊)에 도착하였다. 이때 백정(白丁)들이 보의사(普義社)를 중심으로 자기들도 갓을 쓰는 데 있어서 갓끈을 평민들과 똑 같은 것을 쓸 수 있도록 해달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가 도찰사로서 이를 허락한 것이었다. 이에 백정들이 고맙게 여기고 보의당(報義堂)을 세워 기념하였다. 그는 이 보의당을 무너뜨리고 부정에 가담한 관리들을 처벌하였다. 그런데 경주에 도착하자 시찰사(視察使) 강용구(康容九)가 임금의 명이라 하며 도찰사의 직권을 빼앗아 갔다. 이후 그는 서울로 올라가 평리원에 구속되었으나 곧 무죄로 풀려났다. 그 뒤 상소를 올려 관직에서 물러나려 하였으나 고종은 중추원의관의 벼슬을 내렸다.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어려움을 겪던 고종은 그에게 “경(卿)이 화천지수(華泉之水)을 아는가, 짐은 바라노라”는 비밀 조칙을 내렸다. 이를 받들고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1905년 12월 30일, 관직을 사퇴하였다. 우선 장남 정용기를 불러 뜻을 전하고, 군자금으로 하사금 5만 냥과 전 참찬 허위(許蔿)로부터 관직에서 물러난 동료들의 모금액 2만 냥을 확보하였다. 아버지의 뜻을 받든 정용기는 고향 영천으로 내려와서 이한구(李韓久), 정순기(鄭純基) 등 평소 가까운 사람들과 뜻을 모으고, 「경고문」 및 「통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돌렸다. 이어서 영천창의소(永川倡義所)를 설치하고 각지로 사람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영해(寧海) 방면의 신돌석과도 긴밀한 협조를 약속받았다.
영천창의소 설치 소식이 각지에 전해지자 경상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은 규모의 여러 의병부대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 결과 1906년 3월 29일, 정용기를 대장으로 하는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는 이름의 의병부대가 결성되었다. 여기서 산남이란 영남(嶺南)을 뜻한다. 산남의진은 처음부터 관동(關東), 곧 강원도 강릉(江陵)으로 올라갈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것은 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정용기는 의진을 몇 개의 분대로 나누고 강원도 오대산으로 가서 모이도록 명하였다. 3월 5일, 대장 정용기도 본진을 이끌고 영천, 청송지방을 거쳐 북쪽으로 향하였다. 이때 그는 서울에서 4월 중순 경, 모집된 의병 100여 명을 강원도 강릉 남쪽 금광평(金光坪)으로 보내서 산남의진을 맞이하도록 준비하였다.
신돌석 부대가 영해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운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용기는 이를 돕기 위해 군사 600여 명을 이끌고 영해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1906년 4월 28일, 흥해군(興海郡) 우각(牛角, 현 포항시 북구 신광면)을 지나던 중, 경주진위대에서 ‘정환직이 서울에서 구속되었으니 협상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정용기는 이것이 속임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중군장 이한구에게 모든 지휘권을 부탁하고 경주진위대로 갔다가 붙잡혀서 대구 경상감영으로 끌려갔다.
중군장 이한구가 산남의진을 이끌고 영천, 강구, 청하 등지를 돌다가 1906년 7월 하순경 의진을 해산하고 말았다. 감금되었던 정용기는 아버지인 그의 주선으로 그해 9월, 대구경무청에서 풀려났다. 영천으로 돌아온 정용기는 이듬해인 1907년 4월, 산남의진을 다시 일으켰다. 그도 서울에서 내려와 의진의 여러 부장들을 만나고 1907년 5월, 관동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 무기와 장비 확보에 힘썼다.
산남의진은 관동으로 올라갈 길을 트기 위해 신돌석 부대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동해안 쪽으로는 척후병을 보내 길을 찾는 한편, 영해, 청하, 청송, 포항 지역을 돌며 일본군과 전투도 벌였지만 북상 길은 계속 지연되었다. 1907년 8월 말, 산남의진의 관동 진출을 기다리던 그는 결국 홀로 강릉으로 갔다. 다시 동해안을 따라와 영천으로 와서 정용기를 만나 산남의진의 북상 길을 재촉하였다. 이후 강릉에서 서울 공격 작전을 추진하기 위해 아들 정용기를 독려하는 한편, 서울에서는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대비하였다.
그의 계획에 맞추어 정용기도 음력 9월 초순까지는 강릉에 도착할 계획을 세우고 그 준비를 위해 본부 선발대 100여 명을 이끌고 청하군(淸河郡) 죽남면(竹南面)의 매현(梅峴, 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매현리)으로 들어가 머물렀다. 10월 6일 오후, 일본군이 청송에서 청하군 죽남면 입암(立巖, 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에 들어와 머문다는 정보를 얻었다. 정용기는 우재룡(禹在龍) · 김일언(金一彦) · 이세기(李世紀) 세 부장을 각각 일본군 영천수비대의 길목에서 숨어 기다리게 하고, 본대는 10월 7일 새벽, 입암을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을 완전 소탕하기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이세기 부장이 10월 6일 밤, 입암에서 일본군 병사 몇 명을 발견하자 성급하게 공격하였다. 이세기가 이끄는 군사들은 숨어있던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갑작스런 총소리에 놀란 정용기도 입암으로 진격해 갔으나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10월 7일 새벽까지 전투를 치렀다. 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중군장 이한구 등 수십 명의 부장들과 병사들이 전사하였다. 이것이 죽장면 입암리 산 25번지에서 벌어졌던 ‘입암전투’이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산남의진의 지휘부는 무너지고 관동으로의 진출도 어려워졌다.
그는 아들 대신 대장이 되어 무너진 의진을 일으켜 세웠다. 청송 보현산(普賢山) 일대에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는 한편, 여러 부장들을 각지로 보내어 병사들을 모집하였다. 입암전투 3일 만인 10월 9일, 약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청하분파소를 공격하여 순검 1명을 죽이고 분파소를 불태웠다. 산남의진은 10월 18일 밤, 북동대산(北東大山)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청하, 영덕, 청송 등 여러 곳에서 무기와 식량을 모았다. 병사들의 훈련은 울산분견대 군인 출신 우재룡, 김성일(金聖一), 김치현(金致鉉)이 맡았다. 10월 28일, 의병 80여 명을 이끌고 흥해를 공격하여 우편취급소와 분파소를 불태우고 취급소장 등 3명을 죽였다. 11월 4일에는 신녕(新寧)을 공격하여 분파소에 보관되어 있던 총기 등 60여 점을 확보하였다. 이튿날 5일에는 의흥(義興)을 공격하여 분파소를 불태우고 총 49자루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1월 7, 8일에는 청송 두방리(斗坊里)에서 머무는 데, 비가 내려 통신이 끊기고 탄약도 거의 떨어졌다. 그 뿐만 아니라 습기에 약해진 화승총은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일본군은 이를 틈타 기습적으로 공격해 왔다. 11월 8일, 청송 유전(楡田)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의진 전체가 패하고 말았다. 11월 10일, 산남의진은 추격하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보현산으로 모인 뒤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청송으로, 다른 하나는 영일군 기계(杞溪)로 이동하였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11월 16일, 흥해군 신광(神光)에서 정완생(鄭完生)을 수장(首將)에, 우재룡을 부장(副將)에 임명하고 흥해를 공격하게 하여 분파소를 불태우고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검 1명씩을 사살하였다.
그가 이끈 산남의진은 청송 보현산 일대와 영일 동대산 일대를 중심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일본군은 안강(安康), 기계 등 동해안 일대에서 기습 공격을 계속 해 왔다. 12월 5일, 영덕 부근에서 일본군 헌병대 영덕분견대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12월 7일, 의병 83명을 이끌고 영덕을 공격하여 일본군 헌병 등 20여 명을 죽였다. 그 뒤 부대 근거지를 경주로 옮기려 했지만 탄약과 무기가 거의 바닥났고, 일본군의 포위망도 계속 좁혀져 왔다. 최후로 부대를 1대씩 나누어 북상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자신이 먼저 관동으로 들어가 병사들을 기다릴 것이니 병사들도 각지로 나아가 탄약과 무기를 구하여 관동으로 모이도록 명하였다. 병사들에게는 상인 또는 농부로 변장하고 떠나도록 하였다.
1907년 12월 7일, 영일군 흥해면 마산리(馬山里)에 머물다가 일본군 수비대의 정보망에 발각되었다. 12월 10일, 그는 청하(淸河) 각전(角田)에서 의진을 해산하고 동대산을 돌아 내려오다 12월 11일 오전 8시 40분, 죽장면 각전 고천(高川)에서 영천수비대에게 붙잡혔다. 청하를 거쳐 대구로 잡혀 오는 동안 거듭된 심문으로 귀순을 권유받았으나 끝내 거부하였다. 대구 감옥에 구금되어 있다가 풀려나 영천으로 돌아오던 중 도주를 기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1907년 12월 20일, 영천 남쪽 교외(郊外)에서 총살형을 당하여 순국하였다. 이때 나이 64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