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조선이 곧 독립될 것이라는 ‘미국의 소리’ 방송 내용을 전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2월을 받고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23년 8월 4일 함흥동린구락부(咸興同隣俱樂部)에서 주최한 유학생 대강연회에서 「심성(心性)과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에서 수학하던 중 1925년 동경유학생학우회 편집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동교(同校)를 졸업할 때까지 방학 등을 이용하여 국내로 들어와 수시로 강연활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8월 23일 함흥(咸興)의 동명극장(東明劇場)에서 재외함흥유학생학우회(在外咸興留學生學友會)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사적(史的)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1928년 8월 13~14일에도 일제당국의 강좌 불허가를 규탄하는 연설회와 함흥시내 각 학교의 맹휴(盟休) 사건을 비판하는 연설회에 연사로 참여하였다.
1928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귀국하여 서울의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29년에 일본에서 『무산자신문(無産者新聞)』,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에서 『레닌주의 초보(初步)』 제1권 등을 받은 사실이 일본경찰에 탐지되었다. 1931년 8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퇴직하고 잠시 함흥으로 귀향했는데, 1932년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북도경찰부에 붙잡혔다. 1933년 2월부터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에 들어가 영업국장 등으로 근무하였다. 1932년 12월부터 1933년 1월 사이에 김찬(金燦)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1943년 4월 함흥에서 한병도(韓秉道)에게 “미국에서의 방송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이승만(李承晩) 일파가 미국정부의 원조를 받아 조선임시정부(朝鮮臨時政府)를 조직하고 이승만이 그 대통령이 되어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이번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돌아가면 반드시 조선독립은 실현될 것이므로 재선(在鮮) 조선동포들은 그 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 전쟁이 장기화되면 물자가 풍부한 미국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고 그때 위의 방송과 같이 조선 독립은 실현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외에도 이증림(李增林) 등 여러 인사들에게 조선이 곧 독립될 것이라는 「미국의 소리」 방송 내용을 전달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전시(戰時)에 군사에 관한 조언비어(造言飛語)’를 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10월 11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 이른바 ‘육군형법(陸軍刑法) 및 해군형법(海軍刑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선고받았다. 옥고를 치르던 중 1944년 1월 21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이튿날인 1월 22일 끝내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43. 10. 11)
- 판결문(경성복심법원:1944. 2. 18)
- 집행원부(執行原簿)(경성복심법원 檢事局, 1944)
- 형사공소사건부(刑事控訴事件簿)(경성복심법원 검사국, 1943)
- 동아일보(東亞日報)(1927. 8. 26, 1933. 1. 21, 2. 1)
- 매일신보(每日申報)(1923. 8. 10, 1932. 12. 5, 1933. 2. 2)
- 시대일보(時代日報)(1925. 12. 30)
- 중외일보(中外日報)(1928. 8. 9)
- 밀송간행물(密送刊行物) 취체(取締)에 관한 건(조선총독부 경무국장:1929. 6. 13)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4권 877면
- 일제말기 문석준(文錫俊)의 유고(遺稿) ‘조선역사(朝鮮歷史)’와 ‘조선역사연구(朝鮮歷史硏究)’ (박찬승, 우송조동걸선생정년기념논총Ⅰ, 1997)
- 일제말(日帝末) 단파방송(短波放送) 수신사건으로 옥사(獄死)한 신문기자 문석준(文錫俊)·홍익범(洪翼範) (정진석, 월간조선 28권 4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