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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54782
성명
한자 文錫俊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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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17 훈격 애국장
1925년 동경유학생학우회(東京留學生學友會) 편집부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7년과 1928년 재외함흥유학생학우회(在外咸興留學生學友會) 주최 강연회에서 연설을 하였으며, 1929년 무산자신문(無産者新聞) 등 ‘불온출판물’을 수신(受信)한 사실이 일경(日警)에 탐지되었고, 1933년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朝鮮共産黨再建事件)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음.
1943년 조선이 곧 독립될 것이라는 ‘미국의 소리’ 방송 내용을 전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2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4년 1월 21일 보석(保釋)으로 석방(釋放)되어 이튿날 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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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23년 8월 4일 함흥동린구락부(咸興同隣俱樂部)에서 주최한 유학생 대강연회에서 「심성(心性)과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에서 수학하던 중 1925년 동경유학생학우회 편집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동교(同校)를 졸업할 때까지 방학 등을 이용하여 국내로 들어와 수시로 강연활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8월 23일 함흥(咸興)의 동명극장(東明劇場)에서 재외함흥유학생학우회(在外咸興留學生學友會)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사적(史的)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1928년 8월 13~14일에도 일제당국의 강좌 불허가를 규탄하는 연설회와 함흥시내 각 학교의 맹휴(盟休) 사건을 비판하는 연설회에 연사로 참여하였다.

1928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귀국하여 서울의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29년에 일본에서 『무산자신문(無産者新聞)』,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에서 『레닌주의 초보(初步)』 제1권 등을 받은 사실이 일본경찰에 탐지되었다. 1931년 8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퇴직하고 잠시 함흥으로 귀향했는데, 1932년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북도경찰부에 붙잡혔다. 1933년 2월부터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에 들어가 영업국장 등으로 근무하였다. 1932년 12월부터 1933년 1월 사이에 김찬(金燦)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1943년 4월 함흥에서 한병도(韓秉道)에게 “미국에서의 방송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이승만(李承晩) 일파가 미국정부의 원조를 받아 조선임시정부(朝鮮臨時政府)를 조직하고 이승만이 그 대통령이 되어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이번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돌아가면 반드시 조선독립은 실현될 것이므로 재선(在鮮) 조선동포들은 그 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 전쟁이 장기화되면 물자가 풍부한 미국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고 그때 위의 방송과 같이 조선 독립은 실현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외에도 이증림(李增林) 등 여러 인사들에게 조선이 곧 독립될 것이라는 「미국의 소리」 방송 내용을 전달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전시(戰時)에 군사에 관한 조언비어(造言飛語)’를 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10월 11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 이른바 ‘육군형법(陸軍刑法) 및 해군형법(海軍刑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선고받았다. 옥고를 치르던 중 1944년 1월 21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이튿날인 1월 22일 끝내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43. 10. 11)
  • 판결문(경성복심법원:1944. 2. 18)
  • 집행원부(執行原簿)(경성복심법원 檢事局, 1944)
  • 형사공소사건부(刑事控訴事件簿)(경성복심법원 검사국, 1943)
  • 동아일보(東亞日報)(1927. 8. 26, 1933. 1. 21, 2. 1)
  • 매일신보(每日申報)(1923. 8. 10, 1932. 12. 5, 1933. 2. 2)
  • 시대일보(時代日報)(1925. 12. 30)
  • 중외일보(中外日報)(1928. 8. 9)
  • 밀송간행물(密送刊行物) 취체(取締)에 관한 건(조선총독부 경무국장:1929. 6. 13)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4권 877면
  • 일제말기 문석준(文錫俊)의 유고(遺稿) ‘조선역사(朝鮮歷史)’와 ‘조선역사연구(朝鮮歷史硏究)’ (박찬승, 우송조동걸선생정년기념논총Ⅰ, 1997)
  • 일제말(日帝末) 단파방송(短波放送) 수신사건으로 옥사(獄死)한 신문기자 문석준(文錫俊)·홍익범(洪翼範) (정진석, 월간조선 28권 4호, 2007)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문석준 호 : 평재(平齋) 함남 함주(咸州) 함흥 학생 사건, 조선공산당재건 사건, 단파방송 사건
본문
1894년 8월 2일 함경남도 함주군(咸州郡) 삼평면(三平面) 원상리(元上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평재(平齋)이다. 17세인 1910년 봄에 함흥공립보통학교(咸興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하여 1912년 졸업하였다. 같은 해 4월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京城公立高等普通學校) 부설 교원양성소(敎員養成所)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한 뒤 1915년 봄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4월부터 1923년 1월까지 약 8년간 고향인 함흥의 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4월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고 1928년 3월 졸업하였다.한편 1920년대에 국내와 일본에서 강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8월 4일 함흥동린구락부(咸興同隣俱)樂(部)에서 주최한 유학생 대강연회에서 ‘심성(心性)과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5년 12월 도쿄유학생학우회(東京)留(學生學友會)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편집부 대표로 활동하였다. 일본에 있으면서도 방학 등을 이용하여 수시로 국내에서 강연 활동을 하였다. 1926년 8월 함흥청년회(咸興靑年會) 주최 강좌회에서 ‘자본주의론’에 대해 강의하였다. 1927년 8월 19일 함흥의 동명극장(東明劇場)에서 개최된 함흥농민회(咸興農民會) 창립총회에서 농촌문제강연회 연사로서 ‘여러분은 누구’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같은 달 23일 재외함흥유학생학우회(在外咸興)留(學生學友會)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사적(史的)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28년 8월 13~14일에도 재외함흥유학생학우회 주최로 일제 당국의 강좌 불허가를 규탄하는 연설회와 함흥 시내 각 학교의 맹휴(盟休) 사건 탄압을 비판하는 연설회에서 강연하였다.귀국 후 서울의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교유(敎諭)로 근무하였다. 1929년 1월 초에 일본에서 『무산자신문(無産者新聞)』을, 이후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에서 『레닌주의 초보(初步)』 제1권을 우편으로 받은 사실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1931년 8월 보성고보를 퇴직하였다.이후 낙향하여 1932년 함흥(咸興)의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북도 경찰부에 붙잡혔다. 같은 해 12월경 김찬金(燦)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재건 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북도 경찰부에 붙잡혔다가, 1933년 1월 30일 풀려났다.이때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 방응모(方應謨)와 알게 되어 1933년 2월 입사하게 되었다. 조선일보사에 근무하면서 각지의 수해(水害) 구제사업 등을 주도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는 고(故) 이관용(李灌鎔) 박사 추도회 준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서무부장, 총무국 차장, 영업국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방응모와의 의견 충돌로 1937년 7월 조선일보사를 퇴직하였다.1938년 9월 이래 강원도 회양군(淮陽郡), 금강군(金剛面), 통천군(通川郡) 임남면(臨南面),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멱미면(覓美面), 충북 단양군(丹陽郡) 대강면(大崗面) 등지에 광업권(鑛業權)을 설정하고 광산을 경영하였다.이후 1940년대에 일제 패망과 한국 독립에 관한 단파방송의 내용을 유포한 일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3년 4월 함흥에서 한병도(韓秉道)에게 “미국에서의 방송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이승만李(承晩) 일파가 미국 정부의 원조를 받아 조선임시정부(朝鮮)臨(時政府)를 조직하고 이승만이 그 대통령이 되어 한국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이번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돌아가면 반드시 한국 독립은 실현될 것이므로 재선(在鮮) 한국 동포들은 그 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 전쟁이 장기화되면 물자가 풍부한 미국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고 그때 위의 방송과 같이 한국 독립은 실현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외에도 이증림李(增林) 등 여러 인사들에게 이와 같이 한국이 곧 독립될 것이라는 ‘미국의 소리’ 방송 내용을 전달하였다.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전시(戰時)에 군사에 관한 조언비어(造言飛語)’를 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3년 10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육군형법·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받고 항소하였다. 혹독한 고문으로 고생하다가 같은 해 1월 21일 보증금 50원을 내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튿날인 1944년 1월 22일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부속병원(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附屬病院)에서 끝내 사망하였다. 사망 이후 경성복심법원은 1944년 2월 18일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마르크시즘의 유물사관에 입각해 조선사를 집필한 『조선역사(朝鮮)歷(史)』와 『조선역사연구(朝鮮)歷(史硏究)』라는 유고를 남겼다. 이는 광복 이후 함경남도인민위원회 교육문화부장을 맡게 된 제자 문석구(文錫九)에 의해 1945년 12월과 1946년 8월에 함경남도교육문화부(咸鏡南道敎育文化部)에서 출판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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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육군형법위반, 해군형법위반 징역 1년 2월 경성지방법원 1943-10-1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육군형법위반, 해군형법위반 공소 기각 경성복심법원 1944-02-18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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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기도 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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