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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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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姜壽求
이명 崔昌淳, 姜曄求, 韓俊根,崔浩八, 崔甲八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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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10 훈격 애족장
1927년 함남(咸南) 홍원군(洪原郡) 학천면(鶴泉面)에서 홍원청년동맹(洪原靑年同盟) 학천지부(鶴泉支部) 소년부(少年部), 1929년 홍원청년동맹지부(洪原靑年同盟支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30년 3월 소년의혁단(少年義革團) 학천면(鶴泉面) 지도자(指導者)로서 일제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았으며, 1931년 9월 동면(同面) 책임자로서 호세 증률(戶稅增率) 반대 시위 운동을 전개 중 일경(日警)에 발각되자 피신하여 1933년 2월까지 서울과 홍원(洪原)왕래(往來)하며 조선공산청년동맹 재건(朝鮮共産靑年同盟再建)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33년 12월 16일 병보석(病保釋)으로 출옥 후 1934년 1월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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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9권(2011년 발간)

강수구는 1927년 11월 함경남도 홍원군 학천면에서 홍원청년동맹 학천지부(洪原靑年同盟 鶴泉支部) 설치대회에서 소년부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30年 3월 소년의혁단(少年義革團) 학천면 지도자로서 일제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1931년 9월 홍원농민조합 학천면 책임자로서 호세증률(戶稅增率)에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자 피신하여 1933년 2월까지 함경남도 함흥과 홍원, 함주, 서울, 평양 등지를 왕래하며 노동운동에 주력하였다.

강수구는 1933년 2월 조선공산청년동맹(朝鮮共産靑年同盟) 재건을 위해 활동하던 김필현(金弼鉉)과 연락을 취하다 다시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후 함흥경찰서로 이송되어 병으로 신음하던 중 1933년 12월 16일 보석이 되어 자택에서 치료를 하였으나, 1934년 1월 17일 옥고의 여독으로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중앙일보(1934. 1. 23)
  • 京東警高秘 第148號, 秘密結社 赤色鐵工勞動組合事件 檢擧의 件(1933. 1. 20)
  • 京東警高秘 第1976號, 思想에 關한 情報綴(2)(1933. 7. 14)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9권 644면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中外日報(1927. 11. 23, 1930. 3. 24)
  • 東亞日報(1934. 1. 21)
  • 京鍾警高秘 第4246號, 天道敎少年聯合會 集會取締 狀況報告(通報)(1931. 4. 7)
  • 京東警高秘 第352號, 左翼鮮人 姜壽求의 動靜에 關한 件(1933. 2. 24)
  • 思想彙報(朝鮮總督府 檢査局, 1937) 제12호 169면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국사편찬위원회) 제10권 56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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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수구 최창순(崔昌淳), 강화구(姜嘩求), 한준근(韓俊根), 최호팔(崔浩八), 최갑팔(崔甲八) 함경남도 홍원(洪原)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본문
1908년 11월 30일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학천면(鶴泉面) 풍동리(豊洞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는 최창순(崔昌淳)·강화구(姜嘩求)·한준근(韓俊根)·최호팔(崔浩八)·최갑팔(崔甲八)을 사용하였다. 홍원군에 소재한 사립 학천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이후 강화구(姜驊求)·강길구(姜吉求)·강원모(姜源模) 등과 교류하면서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연구회’를 결성하였다. 1930년 초 홍원군에 소재한 소년혁명단(少年革命團)에 가입하였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소년혁명단의 학천면 지도자가 되었다. 3월 14일 강웅구·김인홍·도상국 등과 함께 ‘해방’이라는 깃발을 들고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 운동의 목적은 일제의 한국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 달성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최유석(崔遺錫)·김삼룡(金三龍)·정요수(鄭遼守)·권영규(權榮奎)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년 넘게 재판도 받지 못하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1년 4월 15일 함흥지방법원은 이른바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4월 16일에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기간은 법원에서 판결한 형량보다 훨씬 길었다.1927년 이전 홍원군에 소재한 학천청년회에 몸을 담으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1월 23일 강혁(姜赫)의 주도로 학천청년회원들이 모였다. 학천청년회 회원들은 모임을 해체하고 홍원청년동맹 학천지부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여기서 이종락(李鍾洛)과 함께 소년부에 소속되어 활동하기로 하였다. 1929년에는 홍원청년동맹지부에서 활동하였다. 출옥 이후 계급적 혁명단체인 홍원농민조합에 몸담았다. 9월 호세(戶稅)가 증가함에 따라 부락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가자 ‘호세증율(戶稅增率)’ 반대 운동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홍원 읍내 장날에 부락민들과 함께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시위운동이 전개되기 전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2년 3월 서울 신당리(新堂里)에 소재한 강경자(姜京子)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잡지사 『이러타』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최봉식·변효식(邊孝植)·이석만(李碩萬) 등과 함께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동생 강두구(姜斗求)로부터 최봉식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함흥부(咸興府) 하서리(荷西里)에 소재한 강목구(姜穆求)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자신은 노동운동, 강목구는 농민운동을 통해서 독립을 달성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그리고 8월 반전 데이를 기해서 ‘반전 삐라’를 함흥부 내에 배포하기로 뜻을 모았다. 하지만 경비 부족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후 흥남(興南) 일대에서 노동운동을 지도하면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강목구의 체포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2년 11월 다시 서울 강경자의 집으로 왔다. 여기서 홍원군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던 안종세(安鍾勢)와 조선혁명자동맹(朝鮮革命者同盟), 적색철공노동조합(赤色鐵工勞動組合)을 조직한 김필현(金弼鉉)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청년동맹의 재건을 위해 활동하였다. 하지만 김필현이 1933년 1월 16일 일제 경찰에 체포된 뒤 2월경 동대문경찰서 소속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함흥경찰서로 이송되었다. 10개월이 넘는 경찰서 유치장 생활 중 병을 얻어 12월 16일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하지만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1934년 1월 17일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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