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25년 2월 22일 함흥청년회관에서 개최된 함남청년대회(咸南靑年大會) 준비위원회에서 준비위원에 선임되어 3월 21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함남청년대회를 이끌었다. 같은 해 4월 1925년 5월 8일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인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 총회 취지서 서명에 참여하고 발기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10월 25일 개최된 함남청년연맹(咸南靑年聯盟)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29일 함경남도(咸鏡南道) 덕원군(德源郡) 적전동(赤田洞) 당우리(堂隅里) 지역 내 노동자들과 청년들을 규합하여 당우노농청년회(堂隅勞農靑年會)를 조직하고, 집행위원 겸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어 교양부 임무를 맡아 힘을 기울였다.
1927년 5월 서울에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朝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 창립대회가 개최되자, 덕원청년연맹(德源靑年聯盟) 대표로 참석하였다.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는 1926년 서울에서 조직되어 민족주의 진영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진영 사회단체까지 망라한 협의체 조직이었다. 1927년 12월 함남기자연맹 주최로 개최하려 한 함남기자대회를 일제 경찰이 금지하자 참가자들은 ‘경찰탄핵연설회’를 개최하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때 일제 경찰이 시위자들을 체포하자, 강기덕(康基德)·한병락(韓秉洛) 등과 함께 이들의 체포 이유에 대해 항의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28년 4월 4일 방면되었다. 한편 같은 해 2월 28일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고려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김경식(金景植)과 함께 함경남도 지방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 방면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결성에 힘을 기울였다.
1929년 2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길림현(吉林縣)으로 건너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으로 최덕준(崔德俊)·고광수(高光洙)·강진(姜進) 등과 공산청년회 재건 방안을 협의하고, 임시선전부장(臨時宣傳部長)에 선임되었다. 이후 안정식(印貞植)과 함께 일본 도쿄(東京)로 파견되어 공산청년회 일본부(日本部) 재건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활동을 탐지한 일제 경찰을 피해 1930년 2월 러시아로 몸을 피신하였다. 같은 해 8월 한국을 거쳐 다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활동을 탐지한 일제 경찰에 의해 1931년 1월 도쿄에서 체포되어, 1932년 10월 28일 도쿄공소원(東京控訴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을 이유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후 아키타(秋田)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5년 7월 30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조선일보(朝鮮日報)(1925. 2. 26, 1926. 1. 4, 1930. 7. 19, 1931. 12. 2, 1935. 8. 11)
- 시대일보(時代日報)(1926. 1. 5, 1926. 3. 15, 8. 8)
- 동아일보(東亞日報)(1925. 10. 27, 1927. 12. 18, 12. 31, 1928. 1. 6, 1930. 12. 28, 1931. 12. 2, 1932. 10. 30)
- 중외일보(中外日報)(1927. 8. 14, 1928. 1. 20, 4. 7, 9. 28, 1931. 12. 2)
- 매일신보(每日申報)(1930. 6. 25, 1932. 10. 30)
- 조선시보(朝鮮時報)(1931. 12. 2)
- 조선신문(朝鮮新聞)(1932. 10. 29)
-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1935. 8. 10)
- 검찰사무(檢察事務)에 관한 기록(記錄)(2)-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 준비위원회의 동정에 관한 건(경성종로경찰서장:1925. 4. 23)
- 사상문제(思想問題)에 관한 조사서류(調査書類)(3)-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 개최상황 및 집회금지에 관한 건(경기도:1927. 5. 30)
- 특고월보(特高月報)(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1932) 9월호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 189면
- 근대일본사회운동사인물대사전((日本)アソシエーツ, 1997) 제4권 2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