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전남 보성(寶城) 출신으로 1909년 6월 안규홍(安圭洪)의진에 소속되어 1909년 9월까지 보성 일원에서 포군으로 활동하였다.
전남 보성 출신의 안규홍은 가세가 빈한하여 담살이(머슴)로 모친을 봉양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후 거의를 목적으로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고 주인에게 군량과 자금을 받아내는 한편, 참봉 안극(安極)에게도 무기와 자금을 제공받았다.
1908년 2월 관북 출신의 강성인(姜性仁)과 합세하여 병력 70여 명으로 대오를 정비한 후 안규홍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안규홍은 1908년 2월부터 1909년 9월 25일 체포될 때까지 보성·진산·순천·고흥·장흥·광양·함평 등지에서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08년 2월의 보성으로 들어오는 일본군에 대한 기습작전으로 일본군을 궤멸한 파청대첩(巴靑大捷)과 1908년 8월 24일 진산(眞山)에서 일본군 수비대 및 기병과 격전을 벌여 일본군 5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크게 이긴 진산대첩(眞山大捷), 그리고 1909년 5월 이후 함평의 심남일(沈南一)과 연합하여 각처에서 유격전을 감행한 것이었다.
1909년 9월 25일 보성에서 광주경찰서 토벌대에게 체포된 안규홍은 1911년 5월 5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김기준은 1909년 6월 2일 안규홍의진에 들어가 포군이 되었다. 그는 의병 수십 명과 함께 안규홍을 따라 1909년 9월까지 보성군 일원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소위 폭동죄(暴動罪)로 기소되어 1909년 10월 30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받고 공소했으나, 1910년 2월 1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刑事控訴事件簿
- 刑執行事件簿
- 受刑人名簿
- 判決文(大邱控訴院:1910.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