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강원도 횡성(橫城) 출신인 고광수는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 중퇴했다. 1921년 3월 1일 3.1운동기념 선전문을 인쇄하여 배포한 사실이 발각되어 서울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고광수는 국외 탈출을 결심하고 북간도로 망명했다. 1921년 9월 북간도 소재 ‘상해당 만주뷰로’에 입당한 그는 곧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다. 여기서 고광수는 러시아 내전에 뛰어들어 1922년 3월 고려혁명운동 의용병대에 자원했다고 한다. 1922년 3월 대한의용군에 입대하여 8월까지 하바로프스크에 머물다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소비에트 러시아 공청(레닌주의 공산청년회) 및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한 고광수는 1925년 10월 국내로 돌아왔다.
1926년 2월부터 7월 20일까지 조선노동당에서 활동하며 합법적 신분을 얻기 위해 경성기독교청년회관[ymca] 영어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6월 대대적인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해 해외로 망명했던 고광수는 8월에 입국했다. 그사이 지도부의 공백으로 와해 직전에 놓인 상황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고광수는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청년동맹과의 통합에 노력하여 ‘통합 고려공청’을 탄생시키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국내외를 오가며 공산주의 청년단체의 통일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힘썼다.
1929년에는 길림에서 ‘조공재조직중앙간부회’ 결성에 참여한 고광수는 6월부터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철도부설공사장 인부로 일하면서 조공 재건을 위한 지하운동을 하던 중 체포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을 받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폐결핵에 걸려 신음하다 1930년 1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2월 5일 숨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7)(朝保秘 제1019호:1926. 9. 15)
- 治安狀況(江原道, 1938)
- 동아일보(1929. 12. 28, 1930. 2. 7)
- 조선일보(1930. 2. 1)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 23면
- 독립운동사료집(국가보훈처) 러시아편① 자료35, 8면
- 思想에 關한 情報綴 제2책(京鍾警高秘 1390호의 1 : 1930. 2. 6)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준엽·김창순, 1986) 2권, 389, 401, 43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