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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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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高光洙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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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7 훈격 애족장
1921년 3월 1일 3.1운동 기념 선전문을 배포하다 3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같은해 6월 25일 북간도로 탈출하여 9월 20일 상해파 고려공산당 만주뷰로에 입당한 후 1922년 3월 고려혁명운동 의용병대에 가담하였고, 1925년 10월 16일 서울에 돌아와 1926년 2월부터 7월 20일까지 조선노동당에서 활동하고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있으면서 공산주의 청년단체의 통일에 힘쓰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예심을 받던 중 고문으로 얻은 폐결핵으로 출옥 후 사망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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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강원도 횡성(橫城) 출신인 고광수는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 중퇴했다. 1921년 3월 1일 3.1운동기념 선전문을 인쇄하여 배포한 사실이 발각되어 서울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고광수는 국외 탈출을 결심하고 북간도로 망명했다. 1921년 9월 북간도 소재 ‘상해당 만주뷰로’에 입당한 그는 곧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다. 여기서 고광수는 러시아 내전에 뛰어들어 1922년 3월 고려혁명운동 의용병대에 자원했다고 한다. 1922년 3월 대한의용군에 입대하여 8월까지 하바로프스크에 머물다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소비에트 러시아 공청(레닌주의 공산청년회) 및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한 고광수는 1925년 10월 국내로 돌아왔다.

1926년 2월부터 7월 20일까지 조선노동당에서 활동하며 합법적 신분을 얻기 위해 경성기독교청년회관[ymca] 영어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6월 대대적인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해 해외로 망명했던 고광수는 8월에 입국했다. 그사이 지도부의 공백으로 와해 직전에 놓인 상황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고광수는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청년동맹과의 통합에 노력하여 ‘통합 고려공청’을 탄생시키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국내외를 오가며 공산주의 청년단체의 통일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힘썼다.

1929년에는 길림에서 ‘조공재조직중앙간부회’ 결성에 참여한 고광수는 6월부터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철도부설공사장 인부로 일하면서 조공 재건을 위한 지하운동을 하던 중 체포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을 받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폐결핵에 걸려 신음하다 1930년 1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2월 5일 숨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7)(朝保秘 제1019호:1926. 9. 15)
  • 治安狀況(江原道, 1938)
  • 동아일보(1929. 12. 28, 1930. 2. 7)
  • 조선일보(1930. 2. 1)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 23면
  • 독립운동사료집(국가보훈처) 러시아편① 자료35, 8면
  • 思想에 關한 情報綴 제2책(京鍾警高秘 1390호의 1 : 1930. 2. 6)
  •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준엽·김창순, 1986) 2권, 389, 401, 43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고광수 이원선(李元善), 지모사(池模士), 찌모시(Тимоши) 강원도 횡성 제2차~제4차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 검거사건, 고려공산청년회 함남도기관 검거사건
본문
1903년 12월 28일 강원도 횡성군(橫城郡) 횡성면(橫城面) 읍상리(邑上里)에서 고석인(高錫仁)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독립운동에 종사하면서 이원선(李元善)·지모사(池模士)·찌모시(Тимоши)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1913년 4월 횡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3월 졸업하였다. 1919년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횡성읍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전개된 횡성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 횡성 출신 자산가이자 집안의 할아버지뻘인 고창한(高昌漢)의 후원 아래 학업을 계속하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고창한의 가회동(嘉會洞) 저택에 거주하면서 그해 5월 사립중동학교 중등과에 입학하였다. 2학년에 재학하던 1921년 3월 1일에 3·1운동 기념 선전문을 인쇄·배포한 사실이 발각되어 3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이로 인해 중동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1921년 6월 25일 한국을 떠나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1921년 9월 20일경 상해파 고려공산당 중령총회(中領總會, 만주뷰로) 산하 북간도지방회에 입당하였다. 같은 해 10월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가 활동하였다. 1922년 3월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주도하고 있던 대한혁명의용군(약칭 대한의용군, 사령관 李鏞)에 자원 입대한 후 하바롭스크에 주둔한 러시아 적위군(赤衛軍) 제6연대에 편입되어 8월 말까지 복무하였다. 1922년 9월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 입학하여 3년 동안 혁명 이론과 전략 전술을 체계적으로 배우며 1924년 4월 소비에트러시아 레닌주의공산청년회(러시아공청)에 입회하였다. 1925년 8월 20일 코민테른 산하 비밀 양성소КУРС로 전학하여 1개월간 특별교육을 받은 후 조선공산당 사업을 원조하기 위해 국내로 파견되었다. 귀국 직전인 9월 22일 소비에트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5년 9월 하순에 모스크바에서 출발하여 10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도착 측시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의 중앙간부인 김재봉(金在鳳)·김찬(金燦)·박헌영(朴憲永) 등을 만나 코민테른으로부터의 파견 경위 등을 보고한 후 고려공산청년회에 배속되었다. 같은 해 11월 초부터 12월 말까지 강원 지방을 순회하며 공청 야체이카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 사실이 드러나 제1차 검거 사건(신의주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검거되거나 망명한 중앙간부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26년 1월 초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합법 신분을 확보하여 비밀 활동을 보호할 목적으로 1월 20일경 경성기독교청년회관(YMCA) 영어과에 입학하였다. 2월에는 합법 사상 단체인 조선노동당에 들어가 그 속의 비밀 공산주의 단체인 스파르타쿠스단의 중앙간부가 되어 당과 공청의 정책을 관철하고자 노력하였다. 아울러 민창식(閔昌植)이 책임자로 있는 고려공청 야체이카에서 활동하였다. 3월 5일에는 한빈(韓斌)·양명(梁明)·이정윤(李廷允) 등과 함께 공산주의 비밀 단체인 레닌주의동맹(훗날의 엠엘파)을 결성하였다. 이 무렵 전정관(全政琯)·김석준(金石駿)과 함께 조선공산당 야체이카(서울 제2구 제9야체이카)를 구성하고 조선노동당에서의 프랙션 활동을 점검하는 한편 운동선 통일 방침 등을 토론하였다. 제2차 검거 사건이 터진 후 1926년 6월 15일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으로 보선되어 선전부장을 맡았고, 코민테른의 서울 연락부와 연락할 책임도 겸하였다. 7월 19일 조선공산당원이자 정우회 간부인 김세연(金世淵)의 병문안을 하러갔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국내외에서의 비밀 활동 이력을 잘 숨긴 결과 다음 날 일시 석방되어 활동을 지속하였다. 제2차 검거 사건이 확대되는 가운데 7월 25일에는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 자리에 올라 내부 조직을 추슬렀다. 1926년 8월 12일 당 외 공산주의 그룹인 서울파의 공청 조직(고려공산청년동맹)과 합동을 성사시킨 후 통합된 고려공산청년회(합청, 합Y)의 책임비서를 맡았다. 9월 5일에 개최된 합청 중앙위원회에서 모스크바 파견 대표자로 선정되었다. 1926년 9월 24일 서울에서 출발하였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정이 지체되어 11월 11일에야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이정윤과 합류한 후 합청을 승인받기 위한 외교 활동을 다방면으로 전개하였다.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동안 「본인이 고공청(高共靑) 회원이 된 뒤 고공청회에 복무한 경과 상황 개요」, 「과거 당 내부의 정황」, 「고공청과 서울청년회 사이의 합동교섭 전말에 관한 보고」 등을 작성하여 코민테른과 국제 공청에 제출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927년 2월 조선공산당 대표 김철수(金錣洙)가 고려공산청년회 대표 김강(金剛)을 대동하고 모스크바에 올 때까지 지속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체류하던 중 1928년 2월 제3차 검거 사건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1928년 3월 25일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으로 보선되어 선전부를 맡았다. 그해 7월 고려공산청년회와 국제공산청년동맹의 연락 관계를 정상화하려고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같은 해 8월의 제4차 검거 사건으로 당과 공청 조직이 궤멸적 타격을 입자 국경을 넘나들며 조직 재건에 분주하였다. 1929년 1월 지린(吉林)에서 박윤세(朴允世)·박문병(朴文秉)·원태희(元泰熙) 등과 함께 엠엘파의 고려공산청년회 중앙간부를 재조직하고 책임비서를 맡았다. 5월에는 지린에서 한해(韓海)·이경호(李京鎬) 등과 함께 엠엘파만의 조선공산당 중앙간부를 재조직하고 국내 공작을 담당하였다. 이에 따라 6~7월경 입국하였다. 함남 북청(北靑)의 철도부설공사장 인부로 취업하여 합법 신분을 취득한 후 이문홍(李文弘)·박무병(朴武秉, 박원병)·박휘병(朴輝秉) 등과 함께 함경도 일대에서 조직 확대를 꾀하였다. 1929년 9월 24일 함남 북청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에서 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고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다. 일제 경찰과 사법기관의 혹독한 취조를 거치는 동안 목 부위의 상처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데다가 폐결핵 등의 중병까지 얻게 되었다. 서대문형무소 병감에서 신음하다가 먹지도 말하지도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한 뒤에야 1930년 1월 30일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고창한의 가회동 집에 머무르며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월 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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