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황해도 장연(長淵) 사람이다.
1919년 4월 18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大救面) 송천 장날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그는 김창현(金昌鉉) 기독교 청년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뜻을 같이 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진행시켜 갔다. 송천 장날인 4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한 김낙영 등은 사전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인쇄·제작하면서 계획을 차질 없이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 4월 18일에 그를 비롯한 기독교 청년 80여 명이 만세시위를 선도하였고, 이에 모인 수백의 장꾼이 가세하면서 만세시위는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읍내의 경찰과 군인을 동원하여 탄압을 가하였고, 그는 시위를 주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만세현장에서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7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상고했으나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734∼736면
- 판결문(1919. 10. 9 고등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318면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