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4
성명
한자 朴性和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44. 1 학도병으로 일군에 입대한 후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동지를 규합하여 집단 탈출을 모의 거사계획을 주도하다 일 헌병대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3년형을 얻도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함남 갑산(甲山) 사람이다. 일본 조도전(早稻田)대학 이공학부에 재학중인 1944년 1월에 일본군 평양사단 42부대에 강제 징병되었다. 이무렵 일제는 전쟁에 광분하여 소위 '조선인학도 육군특별지원병제도'란 명목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그들의 전선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학병지원은 어디까지나 표면상 지원이었고 실제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일군 평양사단은 42·43·44 보병부대 및 47포병부대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 부대에 각기 배속되었던 학병들은 동년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부대를 중심으로 집단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때 그는 42부대의 김완룡(金完龍)·최정수(崔正守)·전상엽(全相燁)·김윤영(金允永) 등과 함께 모의를 거듭하여 동년 8월부터는 동지를 포섭하는 등 항쟁준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사단내 각부대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는데 그는 학병조직의 참모로 활약했다. 학병항쟁의 계획으로는 평양사단 병영의 폭파 등이 제의되었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웠으므로 일단 부대탈출후 한만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계획을 탐지한 한인 헌병보조원이 그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또 학병동지인 김완룡이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양사단의 학병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도 일군 헌병대에 붙잡혔고, 그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6월 군법회의에서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45. 6. 10 조선군관구 임시군법회의 평양사관구법정)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1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3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39·84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664·665·66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성화 - 함남 갑산(甲山) 삼천당(三千黨)
본문
1921년 11월 19일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 갑산면(甲山面) 서부리(西部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우원형호(宇原亨浩)을 썼다. 1941년 3월 서울의 경기공립중학교(京畿公立中學校)를 졸업하고, 1942년 4월 일본 도쿄(東京)의 사립 와세다제1고등학원(早稻田第一高等學院) 이과理(科)에 입학하였다.와세다제1고등학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3년 11월 상순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배를 타고 귀향하던 도중 함북 청진항(淸津港)에서 그곳 수상경찰서(水上警察署)로 연행되어 이른바 조선학도특별지원병(朝鮮學徒特別志願兵)으로 징집되었다. 1944년 1월 20일 평양부(平壤府)의 조선주둔 일본군(日本軍) 제42부대에 입대하였다. 1944년 4월 1일 편제개정(編制改正)에 의해 ‘조선제42부대 마츠모토대(松本隊)’로 전속되었다.1944년 6월 18일 일본육군 간부후보생 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입대 후 부대 내 한국인 병사에 대한 모멸과 구타, 간부후보생 시험에서 일본인과 한국인의 합격률 차이 등 여러 차별대우로 인해 불만과 민족의식이 강해졌다. 간부후보생 훈련에도 소극적으로 임했으며, 일본인 후보생들에게 ‘내선일체(內鮮一體)’ 등에 대해 자주 비판하였다. 나아가 동료 한국인 학병들과 함께 ‘집단탈출’을 계획하고 이를 주도하였다.1943년 10월 일제는 ‘조선인 학도 육군특별지원병제’를 공포하고 그간 입영이 연기되었던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들을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였다. 1943년 창설된 평양사단은 42·43·44보병부대(步兵部隊)와 47포병부대(砲兵部隊), 48공병부대(工兵部隊), 50치중병부대(輜重兵部隊)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주로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출신 학생들이 다수 입대하였다. 이 부대들에 각기 배속되었던 한국인 학병들은 1944년 7월 훈련병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었다. 이에 42부대 학병들을 중심으로 집단적인 항쟁을 계획하였다.한국인 학병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가 자주 생기면서 이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세계정세나 사상논쟁 등이 화제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패색이 점차 짙어져가자 42부대 학병들은 일제패망과 한국독립을 전망하고 “일본군에 끌려가 죽느니 차라리 싸워서 죽음을 이기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1944년 8월 김완룡(金完龍)·최정수(崔正守)·전상엽(全相燁)·김윤영(金允永) 등과 함께 몇 차례 논의한 끝에, 집단적인 탈출을 준비하기 위해 동지를 모아 삼천당(三千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때 참모장(參謀長) 겸 총무책(總務責)을 맡았다. 당시 “우리는 최고학부의 교육을 받았으므로 개인의 이익을 위해 도망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면서 도망 후 독립운동을 위해 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강령으로는 “모든 주의를 초월하여 일적(日敵)과 싸울 것, 군부 내부를 교란시키는 동시에 무장봉기를 일으킬 것, 자치나 참정권 따위 형식상의 독립이 아니라 실질적이 독립을 쟁취할 것” 등을 정하였다. 구체적인 실천 강령으로는 “군 간부 독살, 병영(兵營) 방화, 탄약고 습격, 사령부 관사촌(官舍村) 접수, 타 부대와 연대하여 공동작전, 국외 독립투사들과 긴밀한 연계 도모” 등을 설정하였다.이렇게 학병들 간의 정신 통일과 구심적 구축에 성공한 후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42부대가 중심이 된 거사 계획은 주로 밤마다 취침시간 전에 방공호에 모여 그 작전을 논의하였다. 먼저 부대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부대를 점령하고 평양시가로 나가자는 것, 화약과 탄약을 입수하여 평양사단을 폭파하자는 것, 일단 부대를 탈출한 후 국경지대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자는 것 등 여러 가지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일단 탈출하여 항일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폭파계획도 병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일제가 패망하는 ‘결정적 시기’에 국내 민중봉기의 계기 확보와 소련의 대일(對日) 선전을 고려한 것이었다.부대 내 정보나 군 수뇌부의 동정을 주시하면서 전세(戰勢)를 세밀히 분석하였다.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이나 필리핀 함락, B29기 내습 등의 정보를 입수하여 동료들을 고무시키고 무기와 식량을 확보하였다. 또 평양 서문여고(西門女高)·정의여고(正義女高) 학생과 연계하여 부대 간, 조직 간 연락을 도모하였다. 거사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탈주로 등을 마련하고 선후책을 짜놓았다. 총책 김완룡의 지휘 아래 각 참모장들이 거사를 주도하기로 하고, 제1지대는 최정수, 제2지는 이철영(李哲永)이 맡아 각 분대·지대를 이끌기로 하였다. 모든 준비를 완료한 후 최종 방공호회의에서 거사일을 1944년 10월 1일 밤 12시로 정하였다. 하지만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 간에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거사일은 한 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되었다.그러나 참여 학병 가운데 노영준(盧永俊)이 헌병대에 있는 예비역 대령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가 미행당한 일과 김완룡이 일본인 상등병을 구타한 사건이 빌미가 되어 탈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같은 해 9월 말 70여 명의 동료 학병들과 함께 헌병대로 연행되었다. 4개월 간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은 후 동료 학병들과 함께 군법회의에 정식으로 회부되었다. 1945년 6월 10일 조선군관구(朝鮮軍管區) 임시군법회의 평양사관구법정(平壤師管區法廷)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3년을 받았다.1945년 광복으로 풀려났다. 이후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병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초기에 치안 활동 등을 주도하던 학병동맹(學兵同盟)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학병동맹에 반대하여 “우리는 국방의 간성(干城)이 되겠다” 등을 내걸고 학병단(學兵團) 결성을 주도하였다. 김근배(金根培)와 함께 학병단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5년 12월 학병단이 학병군(學兵軍)으로 개편될 때에는 김학천(金鶴天)과 함께 참모(參謀)를 맡았다.1948년 8월 중순에 ‘지하총선거’ 관계로 수도청(首都廳) 사찰과(査察課)에서 서울의 중학교 교원과 대학생 다수를 검거할 때 함께 붙잡혔다. 같은 해 9월 3일 이른바 ‘포고령(布告令) 2호’ 위반으로 기소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박성화(관리번호:94)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