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36
성명
한자 金秋銀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3.13 창녕군(昌寧郡) 영산읍(靈山邑)에서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고 다수 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와 결의문(決意文)을 배포하여 주며 독립만세시위를 선도하다 피체되어 징역10월을 받았으며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년여의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남 창녕(昌寧) 사람이다.

1919년 이곳 창녕군 영산읍(靈山邑)에도 서울로부터 3·1독립운동 소식이 속속 전하여지고 천도교 계통을 통하여 중앙으로부터 끊임없는 연락이 있었다.

이에 그를 비롯한 이곳 천도교인 구중회(具中會)·장진수(張振秀) 등을 중심으로 하여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들은 만세운동 날짜를 3월 13일로 결정한 후 야간을 이용하여 목판으로 많은 태극기를 찍어내고, 요약된 독립선언서도 인쇄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도 만들었다. 이와 아울러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여 비밀리에 애국군중의 동원을 꾀하였다.

원래 이들 23명 주동인물의 계획은 많은 사람들을 모아 대중화를 기하여 거사를 의논하려는 것이었으나 정보를 입수한 일경의 저지로 실패하자 태극기와 선언서를 많은 주민에게 배포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는 이해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19. 5. 10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 靈山文化誌 8卷 8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228面
  •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25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226∼1229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추은 - 경상남도 창녕(昌寧) 창녕군 영산면 만세시위
본문
1895년 5월 2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죽사리(竹紗里)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 천도교인이었다. 창녕 지역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고초를 겪었다.1919년 3월 천도교 중앙교단에서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꾸준히 전해오자 천도교인 구중회(具中會)·장진수(張振秀)와 함께 협의하여 3월 13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야간에 모여 목판으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만들었다. 그리고 비밀리 각지에 연락하여 주민들을 규합하였다. 1919년 3월 12일 밤 구중회 집에 동지들과 모여 거사 준비를 점검하였다.3월 13일 구중회 등 22명의 동지들과 함께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였다. 오후 2시경 결사단원들과 함께 만세시위 물품을 지참하고 창녕군 영산면 남산(南山)에서 올라 「결사단원 맹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원래 계획은 이곳에서 개춘회(開春會)라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을 모아 만세시위를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2일 밤 구중회 집 비밀모임 정보를 입수한 창녕경찰서장은 영산경찰관 주재소에 이들의 동정을 살피도록 지시하였다.이에 따라 영산주재소 경찰은 남지(南旨)주재소의 지원을 받아 남산 밑 만년교(萬年橋) 부근에 대기하고 있었다. 결사단원과 함께 하산하자 경찰이 막아서며 집회를 금지하였다. 이때 경찰의 총과 칼을 빼앗아 미나리밭에 던지고, 동지들과 함께 몸싸움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품에 숨겨 온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준 후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가 300여명으로 늘어나자 결사단원과 함께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징과 북을 울리며 소년행진가를 부르면서 영산면 안으로 들어갔다. 시위대는 주재소를 포위하고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는 등 시위를 벌이다가 오후 6시에 자진 해산하였다.창녕경찰서가 보낸 경관 1대(隊)에 의하여 구중회, 장진수 등과 함께 붙잡혀 창녕경찰서로 끌려갔다. 이 소식을 들은 결사단은 오후 8시경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친 뒤 창녕경찰서로 향하였다. 하지만 시위대는 창녕경찰서 앞에서 해산당하였다.1919년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에는 창녕군에서 경남 영산취성청년회 집행위원, 영산청년회, 영산소작회 상무집행위원, 천도교종리원 시민유지회, 영산면의회 유지회, 창녕군농촌진흥회 등에서 활동하고, 노동야학교, 이재민 구재사업 등에 기부하는 등 지역유지로서 역할을 이어갔다. 1930년 3월 2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조형물 영산 3.1 봉화대 경상남도 창녕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영산 3·1독립운동 기념비 경상남도 창녕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추은(관리번호:936)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