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남 창원(昌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웅천면(熊川面) 마천리(馬川里)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웅천의 만세운동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3월 중순경 계광학교(啓光學校) 교사 주기용(朱基溶)이 절친하게 지내던 문석주(文錫柱)·정운조(鄭雲朝)·김병화(金炳化) 등에게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면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주기용의 제안에 적극 찬동하여 4월 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마천리에서 거사를 일으킨 후 창원읍까지 시위하여 읍내의 시위와 합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거사에 필요한 격문과 태극기 등을 주야로 인쇄, 제작하는 한편 동지 규합에 힘을 쏟았다.
마침내 4월 3일 웅천면 마천리 면사무소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군중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오전 11시경에는 약 5, 600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주기용 등 주도 인물들이 재빨리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부한 후,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은 일제히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동개도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웅천읍을 향해 행진해 나갔다. 출발 당시 600여 명이던 군중이 어느덧 3,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렇게 많은 시위군중이 웅천 헌병대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치자 진해로부터 증파된 일 헌병은 현지 일본 헌병 및 일인들과 합세하여 총검으로 군중을 구타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고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그는 이때 검거되어, 이해 5월 27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44년 8월 9일 부산지방법원 마산검사분국에서 일제의 보국대 동원령에 불응하였다고 국가총동원법으로 벌금 100원(圓)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鎭海市史(鎭海市史編纂委員會, 1991) 237∼240面
- 犯罪人名簿
- 慶南每日新聞(1990.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