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상북도 영천(永川) 출신으로 정환직(鄭煥直)의 장남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활달하고 용력(勇力)이 뛰어났으며 정의로운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또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위한 단연회통문(斷煙會通文) 및 「의연금권고가(義捐金勸告歌)」와 정계(政界)의 부패를 비난하는 6개 조항을 들어 정계에 투서하였다.
그 외에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부정행위를 탄핵한 「통곡조한국민(痛哭弔韓國民)」이란 글월 및 순절한 보국(輔國) 민영환(閔泳煥)공을 추도하는 「혈죽가(血竹歌)」, 국가가 처한 위기와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피끓는 각종 문사(文詞)를 발표하고 격렬한 가두연설을 전개해 국민 대중의 각성과 단결을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중계몽에 힘쓰던 중 부친인 정환직이 광무황제의 밀명(密命)을 받고나서 상의하니 이에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北上)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부친의 명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 이한구(李韓久)·손내숙(孫 叔) 등과 힘을 합쳐 각지에 통유문(通諭文)과 권고문을 발송하는 한편 지방관에게는 통고문을, 각 진(鎭)에는 격문을 각각 보내고서 민중에게 호소하는 청조문(請助文), 농민을 안도시키는 고시문(告示文), 사림(士林)을 격려하는 격고문 등을 내어 의병을 소집하고, 관리(官吏) 및 군인의 반성과 민중의 분기를 촉구한 바 있다.
1906년 각지에서 모여든 군중(群衆)의 추대를 받아 의병대장이 되어 산남의진(山南義陣)의 기치(旗幟)를 내걸고 부친의 명에 따라 북상하고자 경주의 우각리(愚覺里)를 경유할 때 부친이 서울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일제의 간계로 인하여 의병진을 중군장(中軍將) 이한구에게 맡기고 경주로 돌아갔으나 곧 체포되어 대구로 이송되었던 까닭에 북상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수감 중에 일본 헌병은 다른 죄수들처럼 그의 머리를 깎고자 했으나
"목은 잘리더라도 머리는 못 깎는다"
고 크게 꾸짖고 항거하니 그들도 감히 거역치 못하였으며 또한 일본 헌병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는 기백을 보이니 적들이 감동하여 찬탄하였다.
이 때 서울에 있던 정환직은 아들의 체포 구금 사실을 알고나서 황제께 아뢰어 특명으로 정용기를 석방케 하였다. 정환직은 아들이 석방된 후 고향으로 내려와 그들에게 재차 의거하여 내년 5월까지는 강릉지방으로 진군(進軍)하도록 지시하고 상경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체포되어 감옥에 있는 동안 의병진이 이미 해산되었음을 통분하게 여기다가 병이 들었던 까닭으로 계획이 늦어졌다.
1907년 4월 비로소 병이 완쾌됨에 재차 의병을 모집하여 북동산(北東山)으로 들어가 4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린 대장이 되었다. 이어 영덕(盈德)의 신태호(申泰浩)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청하읍(淸河邑)을 습격하고 청송(靑松) 신성(薪城) 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적군 3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영천 자양면(紫陽面)에서 적군을 격파하고 일본군 3명을 효수하였으며 이한구와 더불어 매국 5적과 일제의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체포하여 효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 다음날 일본군들은 단계(丹溪)에 이르러 그의 본가에 방화하니 이에 의병진을 돌려 추격해서 적군 1명을 사살하였다.
그 해 10월에 일본군이 대거 내습한다는 척후병의 보고에 따라 좌차영장(左差營將) 이 석(李 錫), 연습장(練習將) 우재룡(禹在龍) 등을 세 방향으로 나누어 막작령(幕雀嶺)에 잠복시켜 일본군을 함몰시킬 작전을 밀명(密命)하였다.
그러나 적군이 내습하였을 때 작전지시와 달리 후군(後軍)이 실수한 까닭에 계획이 실패하자 이에 크게 놀라 이한구 등과 더불어 의병들을 독촉하여 입암(立岩) 원촌(院村) 등 지역에 복병을 매복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의 포격으로 인하여 이한구·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기려수필 140·14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50∼353·386∼390·578∼58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