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이다.
불교 승려 출신으로 불교계 학교인 중앙학림(中央學林)의 학생대표로 활동하면서 김법린(金法麟) 등과 함께 유심회(維心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어 민족의식과 불교대중화를 위해 진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계동에 소재한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의 집에 수 명의 학생들과 함께 모여 한용운으로부터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전달받고, 유심회 회원인 박민오(朴玟梧) 등을 소집하여 3·1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지시한 뒤 3월 1일을 기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불교계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뒤 일경의 체포를 피해 유심회 회원인 김상헌(金祥憲)과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투신하면서 내무국장 안창호(安昌浩)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한편, 불교 승려들의 비밀결사인 승려의용군(僧侶義勇軍)의 조직을 주도하였다.
1919년 8월경 귀국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강원도 특파원으로 임명되는 한편, 임시정부 특파원 이성춘(李成椿)으로부터 동년 10월 3일을 기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을 축하하는 제2의 독립시위운동을 실행하라는 인쇄물을 교부받았다. 그에 따라 9월 중순경 강원도 철원의 신환균(申桓均), 원주의 감리교회 목사 조윤여(趙潤如), 춘천의 유한익(劉漢翼) 등을 방문, 제2 독립시위계획을 설명하고 동조를 구하였다. 그리고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서무국장 강대려(姜大呂)를 만나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시위 계획을 전달하여 동년 10월 철원지역을 중심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다시 상해로 건너온 뒤 11월 14일 여운형(呂運亨)과 동행하여 도일(渡日)하였으며, 1920년 2월 서울로 돌아와 함남 안변(安邊)의 석왕사(釋王寺) 승려 김태흡(金太洽)·강청월(姜淸月)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 노동부(勞動部) 총판 안창호에게 송금하였다. 4월에는 강원도 고성(高城)의 건봉사(乾鳳寺) 승려 정인목(鄭仁牧) 등으로부터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0년 봄 소위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 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혔다.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정치범죄처벌령 등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21년 3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20. 12. 23 경성지방법원)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조선민족운동연감 6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220·397면
- 박은식전서 상권 640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7·166·167·204·36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150·177·30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432·992·993·996·999∼1029면
-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178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29·14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873·874·883∼885·89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2집 145·14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