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남 창원(昌原)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3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熊川面) 마천리(馬川里)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사전 발각되어 붙잡혔다.
웅천의 만세운동 계획은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3월 중순경 계광학교(啓光學校) 교사 주기용(朱基溶)이 절친하게 지내던 문석주와 정운조(鄭雲朝)·김병화(金炳化) 등에게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면서 비롯되었다.
평소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에 대하여 깊게 인식하고 민족의식을 길러 가던 문석주 등은 주기용의 제의에 즉각 찬동하고 4월 3일을 의거일로 정하고, 아울러 마천리에서 거사를 일으킨 후 창원읍까지 시위하여 읍내의 시위와 합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에 문석주 등은 거사에 필요한 격문과 태극기 등을 철야로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 규합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거사 직전 문석주는 정운조와 함께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던 중 일경에 사전 발각되어 붙잡히고 말았다. 이 때 문석주는 일경의 모진 고문을 이겨내면서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고 지킴으로써 4월 3일의 만세운동은 차질 없이 예정대로 치러질 수 있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5월 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을 졸업 후 동경한인노동조합 총연맹의 총무를 맡아 일본지역의 노동운동에 종사하였다. 1928년에 귀국한 그는 청년운동을 지도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31년 5월 19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3·1운동실록(이용락) 642·64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251∼253면
- 진해시사(진해향토문화연구소, 1987) 235∼240·650·65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