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226
성명
한자 朴應九
이명 新井國正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일본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건국포장
1940. 4월 일본(日本) 장기현(長崎縣) 간조시(諫早市) 간조농학교(諫早農學校)에 재학중 심재인(沈載仁) 등이 지도하는 비밀결사에 가입하여 민족의식 고취 등 독립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충남 아산(牙山) 사람이다.

1939년 6월 일본 장기현(長崎縣) 간조시(諫早市)에 소재한 간조농학교(諫早農學校) 1학년에 재학하면서 선배인 이상만(李相晩)·박근철(朴根澈)·심재인(沈載仁) 등과 함께 민족정신을 고취하여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3인조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운동 지침과 지하조직 강령을 작성하고 조직원을 33명으로 정하였다.

1940년 4월 신입생 입학 자축회가 개최되자 참석하여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우리 조선학생은 조선인의 문화향상과 동포를 위해 공부해야 한다. (중략) 또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모멸은 그 원인이 조선문화가 열등한 데 있다. 그러나 만약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문화도 이와 같이 저열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늘과 같은 차별적 모욕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게 함이 가장 중요하다. 조선의 독립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조선인이 모름지기 조선인 정신을 견지하여 앙양함과 동시에 조선 독립을 목표로 서서히 시기가 도래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고 신입생들의 찬동을 얻어 그 목적과 실행사항에 대해 협의를 하였다.

이에 따라 식민지정책과 한인에 대한 민족차별정책, 창씨개명을 통한 민족혼 말살정책 등 일제정책을 규탄하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 함양과 유사시에 대비한 무술 연마와 지하운동 전개, 일본의 전쟁 수행에 불리한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인심 교란과 전의를 상실시킬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이후 한국으로 송환된 그는 경북 예천·영주·안동경찰서와 대구형무소에서 2년여 동안 수감되어 잔인한 고문을 받다가 1943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형사사건부
  • 판결문(1943. 5. 7 대구지방법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응구 창씨명 : 신정국정(新井國正) 충남 아산(牙山) 삼인단
본문
1921년 4월 16일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 선장면(仙掌面) 신동리(新洞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신정국정(新井國正)을 사용하였다. 고향에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9년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이시하야시(諫早市) 소재의 이시하야농학교(諫早農學校)에 입학해 1941년 12월 졸업하였다. 이듬해인 1942년 2월에 도치기현(栃木縣) 우츠노미야시(宇都宮市)에 있는 고등농림학교(高等農林學校)에 진학하여 농업 관련 전문지식을 쌓았다.이시하야 농학교에 재학 중 삼인단(三人團)에 합류하면서 독립운동 활동을 시작하였다. 삼인단은 당시 이시하야농학교에 다니고 있던 박근철(朴根澈)이 1939년 11월 일본인 학생에게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폭행을 당한 후 민족의식을 자각하여 독립을 위해 동기 이상만(李相晩)·심재인(沈載仁)과 함께 만든 비밀 조직이었다.1940년 2월 일본에서 “면학(勉學)은 한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며,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독립달성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박근철의 제안에 적극 동의하고, 먼저 학내 동지 모집에 나섰다. 그 해 4월 이시하야농학교 신입생 환영회에 출석하여 한국인 학생들을 한 자리에 모은 뒤, 무엇보다 독립을 유학의 최우선 목표로 두어야 함을 강조하는 등 삼인단의 취지를 설명함으로써 김선중金(善仲)과 김상훈(金相勳)을 비롯한 다수의 신규 회원을 모집하였다.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회원 모집에 힘쓰는 한편, 여러 차례 비밀 회합에 출석하여 동지들과 중일전쟁 상황 등 습득한 일본 정세를 공유하고 운동의 구체적인 실천 방침을 논의하였다.우츠노미야 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그 사이 삼인단은 도쿄(東京)와 미에현(三重縣) 등 일본 지역은 물론 국내까지 세력을 확장한 상태였다. 박근철을 비롯한 국내외 회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면학에 힘써 일본인에게 뒤지지 않도록 실력을 배양할 것, 무술을 단련하여 유사시에 대비할 것, 학생들에게 일제가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과 국가 없는 설움을 알려 희망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것”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삼인조(三人組) 정신’을 실천하며 필연적으로 도래할 독립의 기회를 엿보았다.1942년 초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귀국한 이상만 등이 부산(釜山)과 예천(醴泉) 등지에서 활동하다 검거되어 조직이 노출되면서 일본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42년 11월 13일 예심에 부쳐졌고, 1943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판결이 있기까지 약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르며 일제 경찰의 가혹한 고문과 학대를 받았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박응구(관리번호:9226)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