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3·1독립운동 때 목포(木浦)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연결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기 전에 이곳에서는 일본동경 유학생 남궁 혁(南宮赫)이 2·8독립선언에 참가한 후 귀국하여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의 제창과 피침략민족등의 동향 등을 알려줌으로써 뜻있는 청년과 학생들은 비밀리에 독립운동거사에 싹이 트기 시작하였는데, 때마침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고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음이 알려지자, 같은 기독교인 서상봉(徐相鳳)·곽우영(郭宇英)·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강석봉(姜錫奉)·양병진(楊炳震) 등과 함께 미리 독립선언서·경고문·태극기 등을 만들어 거사일인 1919년 4월 8일 수백명의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함성을 올렸다.
이때 그는 일본경찰에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6월형에, 2년간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후 윤성덕(尹聖德) 목사와 함께 상해로 망명하려다가 체포되어, 신의주(新義州)형무소에 수감된 바 있으며, 1925년을 전후해서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책임을 맡아, 상해와 국내를 왕래하면서 문재열(文在烈) 외 2명과 함께 친지 및 동지를 방문하여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또한 이해 3월,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비밀문서를 서울에 있는 이상재(李商在)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입국하다가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534면
- 수형인명부(자은면장발행)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381·384·386·38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