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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관리번호 917
성명
한자 文達煥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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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06. 최익현(崔益鉉) 의병장 휘하에서 참모급으로 왜군과 항쟁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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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문달환의 본은 남평(南平)이며 전라남도 화순(和順)에 거주하였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면암은 각 지방의 유림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자 고관들에게 함께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1906년 3월 전라북도 태인(泰仁)에 있는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과 제휴하여 의병운동의 거점을 태인·순창(淳昌) 일대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6월 4일(음력 윤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개설하고 유생들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때 문달환은 면암 의진에 입대하였다.

면암 의진은 일본 정부에 글을 보내어 침략주의 일본의 16개 죄목을 들어 성토하고 정읍(井邑)·순창·곡성(谷城) 등지로 진군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관원이나 민중이 호응하여 병력이 3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병의 이러한 세력확대와 함께 일본군의 많은 병력과 여러 차례의 전투가 있었으며, 19일 의병진은 옥과(玉果)로 향하던 도중 적측의 제지를 받아 순창으로 회군, 유진하였다.

그 이후 광주 진위대 소속 관군의 강압과 회유로 많은 군사들이 흩어졌으나 문달환은 문인 12인과 함께 면암을 호위한 채 진중에 그대로 앉아 적을 꾸짖다가 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 때 면암을 위시하여 임병찬·고석진·김기술·임현주·유종규·조우식·조영선·나기덕·이용길·유해용·최제학 등이 함께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태형 100도에 처해지고, 약 2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1906년 8월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매천야록 38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68·36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16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8·90·13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문달환 자 : 덕경(德卿), 호 : 돈재(遯齋) 전남 화순(和順) 중기의병
본문
1851년 8월 21일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청양면(靑陽面) 부곡리(富谷里)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자는 덕경(德卿)이고, 호는 돈재(遯齋)이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이후에도 뜻을 같이 하였다.1905년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창의(倡義)를 고려하기 시작한 최익현은 전북 고창군 출신의 수남 고석진(秀南 高石鎭)과 그 일족인 송천 고예진(松泉 高禮(鎭), 진안군 출신의 최제학(崔濟學),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지낸 태인군의 임병찬(林炳贊)과 무장투쟁을 논의하였다. 그 해 (음)12월 25일에는 최익현을 비롯하여 고석진·고예진 등 200여 명의 유림과 지사들이 충남 노성(魯城)의 궐리사(闕里祠)에서 결집하였다.1906년 (음)2월 30일 최익현이 임병찬을 태인군 종석산(鍾石山)에서 대면하였다. 임병찬은 최익현으로부터 위임받아 군무(軍務)를 총괄하고 의병 모집, 군량 비축, 군사 훈련 등에 나섰다. 유생이 주축인 태인의병이었으나 임병찬의 활동으로 군율(軍律)과 의제(衣制)·규례(規例) 등이 구체적으로 정해졌다. 최익현 의병부대는 고순진(高舜鎭)으로부터 군량미 200석을 희사(喜捨)받은 것을 비롯하여 군량미 500여 석과 군자금을 수합해 병기를 준비하였다. 최익현은 태인에 도착한 이후부터 의병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음)윤 4월 8일에는 전남 담양군 용추사(龍湫寺)에서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과 김병로(金炳魯)를 비롯한 50여 명의 유생과 함께 활동 방법을 논의하였고, 격문과 동맹록을 작성하였다. 동맹록에는 최익현을 비롯하여 고석진·고제만·임병찬·기우만 등 112명의 서명이 확인된다. 여기에 이름을 함께 올린 것으로 볼 때 이 시점에서 최익현의 태인의병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임병찬은 모병과 연병의 지휘 책무, 고예진은 연락과 동원 업무, 강종회(姜鍾會)는 화포장을 맡았다. 또한 김기술(金箕述)·유종규(柳種奎)·정시해(鄭時海)·최제학 등도 여러 임무를 나누어 맡았다. 거의 일자를 (음)윤 4월 13일로 정한 최익현은 일본 정부에 16개 조목의 죄상을 언급한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를 발송하였다. (음)4월 13일에는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가진 후 을사늑약 이후 호남 최초로 태인의병이 조직되었다. 태인의병은 봉기 일주일 만에 900여 명으로 세가 커졌다.이후 최익현 부대는 흥덕군·정읍군·순창군·곡성군 등지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음)4월 15일에는 정읍을 점령하여 무기를 접수하였고, 16일에는 순창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처단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그러던 중 (음)4월 18~20일에는 순창 구암사(龜巖寺)에 머무르던 중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 군수 이건용(李建鎔) 등과 일본 군경의 습격을 받아 교전하였으나 정시해가 사망하였다. 같은 해 (음)윤 4월 20일 최익현 부대가 해산할 때까지 의병활동을 함께 하였다. 이때 해산을 명령하였던 최익현 곁에 계속 머물렀던 소위 ‘12의사(義士)’인 고석진·김기술·최제학·양재해(梁在海)·조우식(趙愚植)·조영선(趙泳善)·나기덕(羅基德)·이용길(李容吉)·임현주(林顯周)·유해용(柳海瑢) 등에 함께 포함되었다.이후 일제 군경에 붙잡힌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음)7월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 위수영(衛戍營)에, 고석진과 최제학은 일본군 사령부에 투옥되었다. 김기술·양재해 등과 함께 장(杖) 100도(度)의 형을 받고 풀려났다.국권 피탈 이후인 1914년 무렵 고석진·고예진 등과 함께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가담하였다. 복벽주의(復辟主義)를 표방한 독립운동단체인 독립의군부는 1912년 8월에 사전 모임을 갖고 9월에 재야 유생과 전직 관료들이 주축이 되어 꾸려졌으나 일제에 발각되었다. 1914년 2월 활동을 재개한 이후 임병찬이 주도하였다. 독립의군부는 최익현 문인과 태인의병, 홍주의병 관계 인사 등 호남지역의 유림이 주축을 이루었다. 여기서 김기술·고예진·고순진·고제만·김양수 등과 함께 군(郡) 대표에 임명되었다. 이를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1914년 5월에 군자금 모집 중에 발각되었으며, 1916년 임병찬이 체포되어 거문도에서 사망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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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당 충의영당 및 춘산사 전라남도 화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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