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강원도 철원(鐵原) 사람이다.
중국 운남강무당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와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에서 활동하였으며, 중일전쟁 시기에는 국민군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망국의 현실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뜻을 세웠던 김세준은 서울 기독교청년학관을 졸업한 직후 1916년 경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던 신규식(申圭植)의 주선으로 중국인 당계요(唐繼堯)가 운남성(雲南省)에 설립한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 군관학교에 이범석을 비롯한 국내 청년학생 3명과 함께 입학하였다.
1917년 운남강무당을 졸업한 그는 박용만 등과 함께 무장투쟁노선에 의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1921년 만주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군사단체를 통일하기 위해 북경에서 군사통일회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김세준 등은 독립운동의 대표적 기관을 새롭게 정비할 필요를 느끼고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923년 1월부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으나, 이때 독립운동 세력들은 임시정부의 존재를 두고 크게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누어졌다. 이때 창조파에 속한 그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새롭게 독립운동 대표기관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이후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넘어가 1923년 가을에 국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때 그는 국민위원회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으나, 국민위원회가 러시아의 탄압을 받기에 이르자 다시 중국 북경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는 1925년 6월 상해에서 중국인들이 일으킨 일영배척운동(日英排斥運動)에 고무되어 고국 동포들에게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중국민족을 후원하기 위해 원세훈(元世勳)·박건병(朴健秉) 등과 의연금 모집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2卷 144面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國會圖書館) 330·500·516·517·518·565·567面
- 金世晙 외 數名 玉祥配下의 軍官學校에 入學의 件(1925. 7. 21, 毛筆草本)
- 추모비 제막식 약력(철원애국선열기념사업회, 1967. 4. 15)
-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 139·200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分冊 772面
- 日本의 韓國侵略史料叢書(韓國出版文化院) 第25卷 336∼338面
- 北京地方定住(來往) 不逞鮮人調(1924, 毛筆草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