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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064
성명
한자 金世晙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년도 1998 훈격 애족장
1917년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군관학교(軍官學校))를 졸업한 후 1921. 4월 북경(北京)에서 개최된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미령 포왜국민군(美領布哇國民軍) 대표로 참가하여 군사통일 방안을 협의하는 한편 이승만(李承晩)위임통치 청원(委任統治請願) 사실을 비난하고 임시의정원의 해산을 요구하는 결의를 하였으며 1924년 국민대표회의의 결렬후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국민위원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1925년 북경(北京)에서 선두자사(先頭者社) 동인(同人)으로서 항일투쟁에 중국민족과 연대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동년 중국군벌 마옥상(中國軍閥溤玉祥)이 설립한 서북군(西北軍) 간부학교에 입학하는 등 활동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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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강원도 철원(鐵原) 사람이다.

중국 운남강무당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와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에서 활동하였으며, 중일전쟁 시기에는 국민군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망국의 현실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뜻을 세웠던 김세준은 서울 기독교청년학관을 졸업한 직후 1916년 경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던 신규식(申圭植)의 주선으로 중국인 당계요(唐繼堯)가 운남성(雲南省)에 설립한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 군관학교에 이범석을 비롯한 국내 청년학생 3명과 함께 입학하였다.

1917년 운남강무당을 졸업한 그는 박용만 등과 함께 무장투쟁노선에 의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1921년 만주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군사단체를 통일하기 위해 북경에서 군사통일회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김세준 등은 독립운동의 대표적 기관을 새롭게 정비할 필요를 느끼고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923년 1월부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으나, 이때 독립운동 세력들은 임시정부의 존재를 두고 크게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누어졌다. 이때 창조파에 속한 그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새롭게 독립운동 대표기관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회의의 결렬 이후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넘어가 1923년 가을에 국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때 그는 국민위원회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으나, 국민위원회가 러시아의 탄압을 받기에 이르자 다시 중국 북경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는 1925년 6월 상해에서 중국인들이 일으킨 일영배척운동(日英排斥運動)에 고무되어 고국 동포들에게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중국민족을 후원하기 위해 원세훈(元世勳)·박건병(朴健秉) 등과 의연금 모집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2卷 144面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國會圖書館) 330·500·516·517·518·565·567面
  • 金世晙 외 數名 玉祥配下의 軍官學校에 入學의 件(1925. 7. 21, 毛筆草本)
  • 추모비 제막식 약력(철원애국선열기념사업회, 1967. 4. 15)
  •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 139·200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分冊 772面
  • 日本의 韓國侵略史料叢書(韓國出版文化院) 第25卷 336∼338面
  • 北京地方定住(來往) 不逞鮮人調(1924, 毛筆草本)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세준 김정치(金正治), 김자열(金子烈) 강원도 철원(鐵原) -
본문
1897년 5월 4일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월하리(月下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정흡(金正洽), 김자열(金子烈) 등이 있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항저우(抗州)의 절강체육전문학교 제3기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닝보(寧波) 경찰청과 항저우시 소방대에서 근무하였다. 1916년에 다시 상하이(上海) 조선인보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6년 이범석(李範奭)·최진(崔震, 일명 崔胤東) 등과 함께 윈난강무당(雲南講武堂) 12기 포병과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1921년 4월 20일부터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신숙(申肅)과 박용만(朴容萬)이 주도한 군사통일회의(軍事統一會議)에서는 각지 군사대표를 소집해 군사 통일 방법을 협의하였다. 회의 준비과정에서 군사위원, 서무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고, 본 회에서는 이승만(李承晩)을 성토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불신임을 결의한 후 이에 따른 제반 문제를 논의하였다. 6월까지 진행된 군사통일회의에서 김천호(金天浩)·박승선(朴承善) 등과 하와이국민군 대표로서 참가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불신임안을 통과시키고 국민대표소집방법안을 결의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방략을 취하였다. 1923년 1월 3일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개혁 방향을 논의하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었다. 기존의 임시정부를 대신할 새로운 조직을 설립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개혁하자는 개조파의 주장이 맞서 회의는 결렬되었다.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6월 초 창조파가 독자적으로 국민위원회와 국무위원회 등으로 구성된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을 때 국민위원회의 국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24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인 원세훈·윤해·신숙·박용만 등 창조파는 새로운 정부 수립을 시도했으나 소련 측의 반대로 3월경 중국 베이징으로 근거지를 옮겨 민족유일당 조직 방안을 모색하면서 1924년 6월 국민위원회 집행위원으로 김규식 등과 한국독립당 조직안을 공포하였다. 그해 7월에 원세훈과 신숙 등이 발의해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를 조직하자, 일반회원으로 동참하였다. 북경한교동지회는 국치(國恥)에 대한 자기반성과 각국에 한국 독립 지원 호소 등에 대한 선전 활동도 전개하였고, 1925년 3월 『앞잡이』란 신문도 창간하였다. 또한 1925년 7월에는 자신들의 주장과 주의를 대변할 『도보(導報)』를 창간하고 앞잡이사도 설립하였다. 원세훈이 주간이었고 조남승·한흥 등과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11월 만주에서 8개 단체가 합병하여 조직된 정의부(正義府)에서 군사부 군사과 주임위원의 중요간부직을 담당하였다. 1925년 4월 4일 배천택(裵天澤)·한진산(韓震山)·유청우(柳靑宇)·서왈보(徐曰甫)·서동일(徐東日)과 함께 비밀결사 다물단(多勿團)을 조직하고 친일파 처단과 군자금 모집 등을 활동 목표로 세우고 취지서와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한편, 1924년 리대소의 주선으로 펑위샹(馮玉祥)이 장자커우(張家口)에 세운 서북육군간부학교(西北陸軍幹部學校)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펑위샹 휘하에서 북벌전에 참가하였고, 이후 장개석을 반대하는 중원대전에 참가하였다. 1937년 7월 노구교사변(盧溝橋事變)으로 시작된 중국 대일항전 시기 송저위안(宋哲元) 부대의 독립 제25여단 상교참모장(上校參謀長)으로, 또 장쯔종(張自忠) 부대의 180사단 소장급 참모장으로 노구교전투, 대아장(臺兒莊)전투, 쉬저우(徐州)전투에 참가하였다. 1940년에는 후베이성(湖北省) 짜오양(棗陽) 남과점(南瓜店)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1940년 장쯔종이 희생된 후 일선 부대를 떠나 국민당 후근부에서 근무하면서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베이징에 머물다 1961년 병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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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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