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강원도 고성(高城) 사람이다.
고성(高城)의 건봉사(乾鳳寺) 승려 출신인 그는 1914년 이후 서울로 올라와 휘문의숙(徽文義塾)과 중앙불교포교당(中央佛敎布敎堂)에서 수업을 쌓았다.
3·1독립운동 직후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 활동했다. 대동단은 독립달성을 위해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로서,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단원으로 포섭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계획하고 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19년 5월 동단의 최익환이 붙잡힌 이후 그 후임으로 선전활동을 주관하면서 동단 발행의 〈선언서(宣言書)〉와 〈임시규칙(臨時規則)〉 등 각종 문서의 인쇄 및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당시 대동단은 사회 각층 중 진신(縉紳)·유림(儒林)·상공(商工)·청년(靑年) 등 4개 단(團)을 중심으로 단원 포섭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청년단의 조직을 정남용이 주관했다. 그리하여 송세호(宋世浩)·나창헌(羅昌憲) 등을 가입시키는 등 조직확대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한편, 대동단은 앞서 최익환 등이 붙잡히는 바람에 조직의 일부가 노출되었고, 또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 등의 발행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것과 함께 동단에 대한 일경의 포위망도 그만큼 압축되어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 협·정남용 등 동단의 주도인사들은 대동단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할 것을 계획하였고, 그 제1단계로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동년 10월 10일에 먼저 상해로 망명케했다. 이어 의친왕(義親王)을 동단의 수령으로 추대하고 상해 망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9일 정남용은 이을규(李乙奎)와 함께 의친왕을 수행하여 서울을 출발해서 만주 안동(安東)까지 갔으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대동단 본부의 상해 이전 계획이 무산됨은 물론, 동단의 조직도 파괴당하고 말았다.
이 일로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잔악한 고문의 여독으로 1921년 4월 18일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기려수필 268·269면
- 박은식전서 상권 636면
- 고등경찰요사 253·254·256∼258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22·124·126·12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29·23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6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0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88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193·195·197·19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444·445·44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