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태어났다.
1896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여 1898년에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운동에서는 간부급으로 활약하였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기독교에 더욱 정진하여 상동교회(尙洞敎會) 목사가 되어, 공옥학교(共玉學校)와 상동 청년학원(靑年學院)을 설립해서 교육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서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동교회에 동지들을 모으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상동교회에 모인 민물들은 전덕기를 중심으로 해서 정순만(鄭淳萬) 이 준(李儁) 이동녕(李東寧) 최재학(崔在學) 김 구(金九) 등 수십 명의 쟁쟁한 인사들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동그룹의 중심인물이 되어 「을사조약」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전덕기 등 상동그룹은 1회, 2회 등으로 사, 오명씩 나누어 연명으로 상소해서 죽든지 체포당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하기로 결정하고, 제1회 상소문을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소두가 되어 5명이 연명해서 대한문(大漢門)앞에 나아가 상소운동을 시작하였다.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5명을 체포해 가자 나머지 상동그룹은 시민들에게 「을사조약」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격렬한 가두연설을 하고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출동하자 전덕기의 지휘하에 시민들은 투석전을 하면 격렬한 시위투쟁을 전개하여 전덕기 이하 수십 명이 한때 체포되었다.
1906년 이 준 박정동(朴晶東)과 함께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공옥학교의 교장이 되어 학도들에게 철저한 애국교육을 시켰으며, 그가 관리하던 청년학원은 애국청년의 양성소로 발전하였다.
1907년에는 이준을 헤이그 밀사로 파견하는데 배후의 역할을 하였다. 헤이그 밀사 파견의 계획은 이 준 전덕기 이회영(李會榮) 등이 1907년 6∼7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의 전갈을 받고 상동교회 뒷방에서 준비되어 고종의 윤허를 받고 추진된 것이었다.
1907년 4월에는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창립의 핵심인사로 활동했으며 신민회의 간부급 회원이 되었다. 1909년에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발기인이 되어 청년운동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기간에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신민회의 이념에 따라 열정적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9월 일제가 신민회 회원을 체포하여 탄압하고 신민회를 해체하려고 소위 「사내총독암살음모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이란 것을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 800여명을 일거에 검거할 때,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심문 도중에 늑막염으로 쓰러져서 불기소되기는 했으나 석방 후에도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병으로 신음하다가 1914년에 결국 일제의 고문의 여독으로 서거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국권회복운동에 끼친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3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26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59면
- 권업신문(1914.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