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충남 천안(天安) 사람이다. 1917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군자금 수합 및 친일부호 처단 등 의협투쟁의 선봉에 섰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단체였다.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은 전반적으로 봉쇄되어 독립운동의 주류가 해외의 독립군기지 개척으로 발전하고 있던 때였는데 이같은 시기에 국내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는 해외 독립군과는 다른 혁명의 구도를 갖고 있었다. 즉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滿洲)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및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일제 식민권력에 안주하며 독립운동을 외면했던 친일부호에 대한 처단은 민족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 독립운동의 민족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처였다. 그는 친일부호 처단을 위해 충청도 지방 부호들의 명부를 작성하는 한편 무기구입에 따른 경비를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相鎭)에게 건네주었고 또 김재창(金在昶)·김경태(金敬泰)·엄정섭(嚴正燮)등을 동지로 포섭하여 군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그리고 친일부호 앞으로 보내는 대한광복회의 포고문을 김재창·임봉주(林鳳柱)와 함께 서울·인천 등지에서 발송하였다.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과 함께 주관하여 악질면장으로 처단대상이 되었던 충남 아산군(亞山郡)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김경태(金敬泰)·임봉주로 하여금 처단케 하였다. 그후 동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1918년초 일경에 붙잡혔으며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고등경찰요사 180·181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1·45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5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673∼732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2권 42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6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