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08년
3. 1908년 6월 독립부대 편성 대장이 되어 활동
4. 1908년 7월 부하 70명 (한때 200여 명에 이름)과 함께
5. 1909년 10월 12일 아들과 함께 전사 (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라남도 광주(光州) 출신이다.
노일전쟁 이후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이 노골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대한 민족적 대응으로서 의병운동이 전국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임창모는 능주(綾州) 출신 양회일(梁會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능주(綾州)를 공격하고 다시 광주를 치려다가 날이 저물어 화순(和順)·동복(同福)의 경계인 흑토치(黑土峙)에 둔병하던 중 적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포위망을 탈출할 수 없게 되자 양회일이 선등대호(先登大呼)하여,
"의병 대장 양회일이 여기 있으니 맞서서 싸우자."
고 외치면서 나아가 싸우다가 적에게 잡혔다.
임창모 역시 힘껏 싸웠으나 역부족하여 결국 체포되었다. 그후 양회일은 광주 형무소에서 장흥으로 옮겨졌으나 단식 7일 만에 순국하였고 임창모는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가 1908년 해배(解配)되어 귀가하였다.
이즈음 전라남도 보성( 城) 일대에서 안규홍(安圭洪, 桂洪, 進士, 담살이)의 의진이 가장 성세를 이루고 있었다.
임창모는 해배되자 마자 안규홍의 의진에 입대하여 선봉장(先鋒將)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안규홍의 보성의진은 파청대첩(巴靑大捷)·진산대첩(眞山大捷)·원봉산(圓峰山) 전투 등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병운동사상 기념비적인 승리를 구가하였다.
6월 이후 임창모는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안규홍 의진과 분진(分陣)하여 보성( 城)을 거점으로 활동하였으며, 전성기에는 부하가 2∼3백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1909년 10월 12일 일본의 의병대토벌전이 전개되어 흑석산(黑石山)에서 일군과 접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폭도편책 45면
- 폭도통계자료 106면
- 폭도토벌군통계철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38·607·608·621·645·65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