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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930
성명
한자 李鐸
이명 李濟鏞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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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5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0년 중국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등이 주도하는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가하였고, 1917년 5월 이진룡(李鎭龍)일경에 체포되자 그 부하들을 재규합하여 독립군부대를 편성하여 무장투쟁을 도모하였으며, 1919년에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칠적(七賊)을 주살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고 국내에 진입하여 의혈투쟁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1919년 11월에 중국 관전현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여 교육부장에 선출되었으며, 1920년에 김승학(金承學)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파견되었고,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 참모장에 임명되어 국내진입 계획을 지도하였으며, 동년 6월 임시정부 동삼성 외교위원부(東三省外交委員部) 위원장에 임명되어 동년 7월에 오동진(吳東振)과 협의하고 3개대의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여 서울, 평양, 선천 등지에서 무장항일 활동하였으며, 1921년에는 신익희(申翼熙),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오산(吳山) 등과 함께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문서과 부주임에 선임되어 한국과 중국 양국의 상부상조와 항일투쟁의 공동 보조를 모색하였으며, 동년 8월 대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外交後援會)를 조직하고 간사가 되어 태평양회의 후원활동을 전개하고, 1922년 5월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준비위원회의 평남 대표로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6년 중국 만주에서 대한독립맹진결사대(大韓獨立猛進決死隊)를 조직하여 남북만의 각 독립단 수뇌들과 삼부통일안(三府統一安)을 협의하고 무력항쟁을 계속할 계획을 세웠으며, 1929년 12월 임시의정원 만주, 간도지방 대표 의원에 선출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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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남 평원(平原) 사람이다.

1908년 평양 대성(大成) 학교에서 교장 안창호로부터 민족교육을 받고, 재학 중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09년에 신민회의 특사로 남북만주 일대를 답사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물색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남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서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이상룡(李相龍) 등 선배들을 도와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가하였다. 1912년에는 신흥학교의 유지를 위해서 피눈물나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는 여준(呂準)과 같이 신흥학교유지회(新興學校維持會)를 조직하고 각 지방으로부터 학교 유지를 위한 성금을 받아 학교의 발전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1913년에는 유하현 일신(日新)학교 교장으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17년 5월 의병장이던 이진룡(李鎭龍)이 관전현(寬甸縣)에서 일경에 체포되자 그 부하들을 재규합하여 독립군부대를 편성하고 무기구입 등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동년 6월에는 동생 이석(李錫)을 만주로 불러 폭탄제조법을 배우도록 하였으며, 1919년에 이 석을 국내에 파견하여 광무황제 국장일(國葬日)을 계기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7적(七賊)을 주살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여 국내에 진입하였는데 모두 27명이 선발되어 3대로 편성되었으며, 1919년 2월 24일에 출발하였다. 이 의거는 그가 대장이 되어 27명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27결사대”라고 명명되었는데 대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안경식(安景植)・주병웅(朱秉雄)・김용우(金容友)・이종욱(李鍾郁)・이해삼(李海三)・차병제(車炳濟)・손창준(孫昌俊)・박기한(朴基寒)・이인식(李仁植 또는 寅植・英雲)・박기제(朴基濟)・박진태(朴鎭台)・이종원(李鍾元)・한선옥(韓善玉)・강성곤(姜聖坤)・오덕연(吳德衍)・한국보(韓國輔)・이연작(李演雀)・황집(黃集)・홍순범(洪淳範)・나경호(羅景鎬)・김병수(金炳洙)・최병인(崔秉寅)・임석도(林析道)・이동우(李東宇)・손동호(孫東浩)・성모(成某).

그는 제1대대 대원 8명을 인솔하고 2월 26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여기서 이우영(李宇榮)・이기원(李基原)・조규수(趙圭洙)・양종환(梁鍾煥)・노윤선(盧胤善) 등을 새로 결사대원에 가입시켰다. 그는 동년 3월 3일 광무황제의 국장일에 행렬이 통과하는 망우리(忘憂里) 고개에서 대원들과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었으나, 매국노들이 융희황제의 어가(御駕)와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독립문에 퇴색된 태극기를 다시 칠하고, 성토문과 격문 등을 배포하면서 계속 매국노들을 암살한 기회를 엿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우영, 주병웅 등 동지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다행히 남만으로 무사히 귀환하여 한족회(韓族會)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동년 9월에는 동생 이석과 전 일(田一)이 봉천성내 중국인 경영 대성관(大成舘)에서 일제 요인 암살과 주요기관을 파괴할 목적으로 폭탄 100개를 제조하다가 불행히도 폭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전일이 현장에서 즉사하는 변을 당하기도 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관전현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가 조직되어 안병찬(安秉瓚)을 총재로 추대하였는데, 그는 교육부장에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20년에는 상해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기 위하여 그는 김승학(金承學)・안병찬과 함께 임시정부에 파견되었으며, 남만의 독립운동단체가 평북 독판부(督辦府)와 긴밀히 협조하여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를 재조직하여, 참리부(參理部), 사령부(司令部), 군영(軍營)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귀환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조맹선(趙孟善)을 사령장(司令長)으로 하는 광복군사령부의 참모장에 임명되어 국내진입 계획을 지도하였다.

1920년 6월 16일에는 임시정부 동삼성외교위원부(東三省外交委員部)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동년 7월에 그는 미국의원단이 내한(來韓)한다는 소식을 듣고 광복군총영의 오동진(吳東振)과 협의하고 3개대의 결사대를 다시 국내에 파견하여 서울, 평양, 선천 등지에서 무장항일 활동을 벌였다.

이에 서울에 파견된 김영철(金榮哲) 등이 거사 3일전에 일경에 체포됨에 따라 1921년 1월 19일 그는 이완용 암살사건과 병합하여 궐석판결에서 징역 12년형을 받았다. 그는 이 기간동안 그의 지휘 아래 일경주재소 습격 56회, 영림서(營林署) 소각 20건, 일본 군경과의 교전(交戰) 78회, 일경 사살 95명 등의 전과를 올렸다고 하니 그의 활약이 얼마나 컸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1921년에는 오동진(吳東振)・이웅해(李雄海)와 함께 관전현 모전자(毛甸子)에서 환인현(桓仁縣)으로 이동하여 무장활동을 계속하다가 상해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동년 신익희(申翼熙)・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오산(吳山 중국인) 등과 함께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문서과 부주임에 선임되어 한국과 중국 양국의 상부상조와 항일투쟁의 공동 보조를 모색하였다. 또한 1921년 8월 26일에는 하와이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를 후원하여 조국의 광복을 호소하기 위해서 대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外交後援會)를 조직하고 김태연(金泰淵)・장덕로(張德櫓) 등과 같이 동 후원회 간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5월에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자 그는 나용균(羅容均)・서병호(徐丙浩)와 같이 서기로 임명되어 회의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으며, 그는 평남 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난항을 거듭하자 그는 임시의정원과 대표회의의 재단합을 실현하기 위해서 김 구(金九)・안창호(安昌浩)・도인권(都寅權)・윤기섭(尹琦燮)・최일(崔日)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구성하는 등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23년 6월 윤해(尹海)・신숙(申肅) 등이 북경에서 별도 회의를 개최하게 되자, 그는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과 공동명의로 이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규에 실망한 그는 1926년 다시 만주로 돌아가 길림성 액목현(吉林省額穆縣) 교하(蛟河) 부근에 수전(水田)을 매수하여 모범농촌을 건설하기 위한 개간사업에 착수하였다. 한편으로는 대한독립맹진결사대(大韓獨立猛進決死隊)를 조직하여, 남북만의 각 독립단 수뇌들과 3부통일안(三府統一安)을 협의하고 무력항쟁을 계속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매수 당한 길림성 공안(公安) 당국에 의하여 안창호 등 여러 동지들이 체포되는 바람에 계획은 성사되지 못하고 동지들의 석방 노력에 전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후 북경(北京)을 거쳐 다시 상해로 와서 활동하였으며, 1929년 12월에는 임시의정원 만주, 간도지방 대표 의원에 선출되었다.

안창호는 그는 가리켜 “만신도시의담인(滿身都是義膽人:그는 일신이 모두 의와 담이다)”고 그를 추모하였으며, 안창호와 그가 상해 신문기자들과 회견을 가진 자리에서는 기자들이 “금일우견손문, 우견황흥(今日又見 孫文, 又見 黃興)”이라 하여 그를 손 문 휘하의 혁명 투사인 황 흥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는 1930년 5월 17일 상해 하비로(霞飛路)에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영면하였으며, 임시정부와 교민단(僑民團)에서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모시고 상해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였다. (1969년 서울현충원 이장)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39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78, 83, 95, 146, 167, 179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9, 257, 258, 259, 302, 359, 45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17면
  • 고등경찰요사 46, 88, 96, 11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35, 58, 61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65, 103면
  • 기려수필 27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 113, 144, 159, 161, 414, 457, 466, 471, 481, 866, 978, 986, 101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307, 308, 337, 390, 402, 87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284, 642, 708, 709, 711, 712, 71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102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56, 236, 292, 303, 305, 308, 312, 330, 354, 407, 414, 536, 593, 637, 64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5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3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307, 329, 404, 76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88, 265, 267, 33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65, 267, 268, 269, 271, 272, 273, 274, 275, 27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8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10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68, 50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탁 - 평남 성천(成川) -
본문
1889년 3월 18일 평남 성천군 영천면(靈泉面) 노동리(蘆洞里) 석계촌에서 이용규(李龍奎)와 김도성(金道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제용(濟鏞), 호는 동우(東愚), 자는 태연(跆然)이다. 부친 이용규는 성천군을 비롯하여 개천군과 강동군에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부농이었다. 5살 때부터 한학을 배운 뒤 1908년 평양 대성학교 속성사범과에 입학하여 안창호의 지도를 받았다. 이 시기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만주 일대를 답사하며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였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서간도로 망명하여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이회영과 이상룡 등을 도와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11년 고향으로 돌아와 가산을 정리하고 아우 이석(李錫)(본명 李濬鏞)과 함께 재차 망명하여 류허현 야저구(野猪溝)에서 토지개간사업을 벌였다. 1912년 경학사를 이은 한인 자치기관 부민단(扶民團) 결성에 참여하였고, 신흥학교유지회를 조직하여 운영기금을 조달했다. 1913년 류허현에 있는 일신학교(日新學校)와 1914년 신흥무관학교 경영에 참여하다가, 1916년 퉁허현(通河縣)으로 이주하였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11월 중국 안둥(安東)(현 단둥)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조직에 참여하여 교육부장에 선출되었다. 1920년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표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되어, 서간도지역에 군사기관 창설에 대해 협의하였다. 같은 해 8월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한독립단, 의용단을 통합하여 임시정부의 서간도지역 군사기관으로 대한광복군사령부가 발족하자, 참모장 겸 사령장대리를 맡았다. 1920년 미국 의원단이 중국을 거쳐 한국을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군 단체는 선전효과를 노리고 ‘작탄(炸彈)거사’를 추진하였다. 광복군총영의 영장 오동진(吳東振)과 협의하여 7월과 8월 80여 명의 결사대를 국내로 밀파하여 친일파 처단과 식민기관 폭파 등의 거사를 추진하였다. 이 거사로 1921년 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오동진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1920년대 초반 상하이 대한적십자회와 대한교민단에 참여하였고, 중한국민호조사에 가담하여 중국 혁명가와의 연대활동에도 힘썼다. 태평양회의 개최 소식이 알려지자 1921년 8월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를 결성하여 임시정부 대표의 외교활동을 지원하였다. 같은 시기 독립운동계의 최대 현안으로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가 대두하였다. 임시의정원이 군책과 군력을 마련할 능력이 없다고 결론짓고 이를 대신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한 것이다. 임시정부에서도 같은 해 5월 12일 안창호가 노동국총판직을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제창하고 나섰다. 같은 해 6월 안창호가 여운형 ・ 김규식 등과 조직한 국민대표회기성회의 집행위원으로 참가하였다. 하지만 이후 우파 독립운동세력은 1921년 11월부터 열린 태평양회의 곧 워싱턴 군축회의에 집중하였고, 좌파 독립운동세력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게 되면서 국민대표회의 소집 움직임은 소강상태에 처하였다. 1922년 2월 두 회의가 끝나면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이 재개되었다. 그는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으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위해 힘썼다. 1923년 1월 초부터 6월 초까지 국내외 지역 대표와 단체 대표 125명이 참가하여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해 재정분과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1923년 8월 베이징(北京)으로 옮겨 안창호와 함께 이상촌 건설 사업에 뛰어들었다. 만주일대를 답사하면서 후보지를 물색하고, 1926년 지린성(吉林省) 자오허(蛟河) 일대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이상촌 건설을 위한 개간사업을 벌였다. 이와 함께 1927년 4월 농민호조사를 조직하였다. 안창호 ・ 이유필 등 흥사단 원동위원부 동지 및 오동진 ・ 김동삼 등재만 독립군 지도자들과 한인 동포의 영농 기반을 마련하고 농민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결성한 것이다. 1920년대 중반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과 재만 독립군단체 통합운동에 동참하였다.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의 영향을 받은 ‘이당치국(以黨治國)’원리에 입각하여 강력한 독립운동 통일기관으로서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는 것이었다. 1927년 2월 지린성에서 안창호와 함께 500여 명의 재만독립군 단체의 주요인물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유일당촉성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경찰에 의해 안창호를 비롯한 독립군 지도자 200여 명이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행히 그 때 베이징행 열차에 타고 있어 위기를 모면하였기에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급히 달려온 이유필과 함께 중국정부를 상대로 석방 교섭을 벌였다.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20여일 만에 안창호를 비롯한 피검자 모두가 풀려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지린성과 펑텐성(奉天省) 지역의 한인학교 폐쇄령과 한인 퇴거령이 내려지자, 손정도와 함께 중국당국과 교섭하여 이를 철회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1929년 상하이로 돌아와서 한인 학생의 중국군관학교 입교에 힘쓰며, 안창호의 지시로 평양과 선천 등지로 잠입하여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같은 해 12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5월 17일 상하이 하비로(霞飛路)소재 고려물산공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임시정부와 대한교민단이 합동으로 사회장으로 치렀고, 정안사로(靜安寺路)에 있는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는 키가 크고 뚱뚱하고 눈이 가늘고 얼굴이 검고 말이 적고 외양이 심히 온후하였다. 그는 한 몸이 도시 의(義)요, 담(膽)이었다. 그는 동지를 지극히 경애하고 무슨 일에나 저를 내세우는 일이 없었다. 그가 유자(儒者)의 가정에서 생장한 것은 그의 독실하고 예절답고 근엄한 태도로 알 수 있었다.”는 스승이자 동지인 안창호의 인물평은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잘 말해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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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결문 내란 공소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24-03-12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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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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