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황해도 연백(延白)군 봉서(鳳西)면 헌죽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의병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의 휘하에 들어가서 소모장(召募將)과 선봉장을 겸임하고, 전국 의병이 연합하여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해서 양주(楊州)에 집결하여 서울진공작전을 결행했을 때 허 위(許蔿)의 휘하에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고향에 돌아갔다. 귀향 후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황해도 지회에서 활동하다가, 안명근(安明根)의 군자금 모금사건을 단서로 일어난 「안악사건(安岳事件)」에 관련되어 1910년 12월에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3년간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에는 다시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연백군에서 시위를 주도했으며, 3 1운동 후에는 황해도 각 군의 동지들과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일명 九月山籌備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과 독립사상 고취에 진력하다가 일제에 다시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석방 후 만주로 망명하여 1923년 10월에 봉천성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加子)에서 양기탁 남 정(南正) 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단체인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았다. 그의 지휘하에 의성단은 장춘(長春)에 있는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여 7시간에 걸친 교전으로 적 60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전과를 올렸으며, 백주에 봉천(奉天) 시내의 만철(滿鐵)병원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는 만주의 각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전만통일의회 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조직하여 각 단체 대표자들을 순방하면서 통합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토의했는데, 1924년 8월에 하르빈에서 중요 임무를 마치고 길림(吉林)으로 가다가 일제 경찰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그는 길가의 상점으로 들어가 장시간의 총격전을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일제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징역 7년형에 처해져서 신의주(新義州)에서 복역하는 도중에 발병하여 병보석으로 가출옥되었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바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독립운동에 끼친 큰 공헌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380 385 38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307 308 30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213 218 237 338면
- 동아일보 1928. 9. 8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2권 6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38 33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68 672면
- 매일신보 1913. 3. 21, 1913. 3. 23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260 26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791면
- 고등경찰요사 116 117 23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761 762 766 76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74 260 261 442 48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9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903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4 118 1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