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함북 경성(鏡城) 사람이다.
일본 무장야(武藏野) 음악학교 재학중인 1944년 1월에 일본군 평양사단내 42부대에 강제 징병되었다. 이무렵 일제는 전쟁에 광분하여 소위 조선인학도 육군특별지원병제도란 명목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그들의 전선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학병지원은 어디까지나 표면상 지원이었고 실제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일군 평양사단은 42·43·44 보병부대 및 47포병부대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 부대에 각기 배속되었던 학병들은 동년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부대를 중심으로 집단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때 그는 김완룡(金完龍)·박성화(朴性和)·최정수(崔正守)·전상엽(全相燁) 등과 함께 이에 대한 모의를 거듭하여 동년 8월부터는 동지를 포섭하는 등 항쟁준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평양사단내 각부대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는데, 그는 제1지대의 분지대를 담당하였다.
학병항쟁의 계획으로는 평양사단 병영의 폭파 등이 제의되었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웠으므로 일단 부대탈출 후 한만 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학병의거를 탐지한 한인 헌병보조원이 이러한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또 학병동지인 김완룡이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양사단의 학병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도 일군 헌병대에 붙잡혔고, 그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군법회의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1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39·841·846·848면
- 판결문(1945. 6. 10 조선군관구 임시군법회의 평양사관구법정)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664·66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