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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845
성명
한자 金允永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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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44. 4. 1 조선인학도지원병으로 일군(日軍)에 입대 복무 중 항일을 위하여 탈출을 기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4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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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함북 경성(鏡城) 사람이다.

일본 무장야(武藏野) 음악학교 재학중인 1944년 1월에 일본군 평양사단내 42부대에 강제 징병되었다. 이무렵 일제는 전쟁에 광분하여 소위 조선인학도 육군특별지원병제도란 명목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그들의 전선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학병지원은 어디까지나 표면상 지원이었고 실제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일군 평양사단은 42·43·44 보병부대 및 47포병부대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 부대에 각기 배속되었던 학병들은 동년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부대를 중심으로 집단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때 그는 김완룡(金完龍)·박성화(朴性和)·최정수(崔正守)·전상엽(全相燁) 등과 함께 이에 대한 모의를 거듭하여 동년 8월부터는 동지를 포섭하는 등 항쟁준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평양사단내 각부대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는데, 그는 제1지대의 분지대를 담당하였다.

학병항쟁의 계획으로는 평양사단 병영의 폭파 등이 제의되었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웠으므로 일단 부대탈출 후 한만 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학병의거를 탐지한 한인 헌병보조원이 이러한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또 학병동지인 김완룡이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양사단의 학병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도 일군 헌병대에 붙잡혔고, 그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군법회의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1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39·841·846·848면
  • 판결문(1945. 6. 10 조선군관구 임시군법회의 평양사관구법정)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664·66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윤영 - 함경북도 경성(鏡城) 평양사단학병의거
본문
1922년 12월 5일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 경성면(鏡城面) 수성동(壽星洞)에서 아버지 김상필(金尙弼)과 어머니 윤순악(尹淳岳) 사이의 5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충주(忠州)다. 최영인(崔英仁)과 결혼하여 2남을 두었다.1940년 3월 북간도 룽징촌(龍井村)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1년 이와테현 모리오카시(岩手縣, 盛岡市) 소재 이와테현립 모리오카야간중학교(岩手縣立盛岡夜間中學校)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43년 졸업 후 도쿄(東京) 무사시노(武藏野)음악학교에 입학하였다. 1학년 재학 중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였다가 일본 군대에 강제 징병되어 그 해 12월 함흥검사장에서 학도지원병 전형검사를 받았다. 이후 1944년 1월 25일 평양 교외 추을에 주둔하는 평양사단에 입대하여 조선 제42부대 산상대(山上隊)에 배치되었다.부대 내무반에서 한국인 학도지원병들은 일본인 고참병들로부터 멸시를 당하면서 강압적인 징병에 대한 강한 불신과 부대 내에서의 모멸적 언동, 사적 제재 등으로 점차 민족의식을 품게 되었다. 특히 1944년 6월 18일 간부후보생 채용시험 결과 한국인 학도병의 합격률이 11%에 지나지 않아 일본군 상층부가 한국인 학도병을 믿지 않아서 부당하게 차별적 처우를 한 것이 명백해졌다. 1944년 7월 전 부대원들이 모이는 오락회 시간에 「봉선화」 와 「사비수(泗沘水)」 를 불러 동기생들에게 민족정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7월 중순 부내 내 민족 차별 등 불만이 고조되자 42부대 내에서 부대 탈출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김완룡(金完龍)·최정수(崔正守)·전상엽(全相燁)·박성화(朴性和)와 자주 모여 일본군으로 끌려가 죽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싸워서 죽음을 이기자고 결의하였다. 42부대는 출신지나 소속 중대에 따라 몇 개의 그룹이 형성되어 있었다.1944년 8월 초순경 김완룡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밀결사 ‘삼천당(三千黨)’이 결성되어 책임부서 인선과 조직이 착수되자 선전을 담당하였다. 함북 출신들로 구성된 참모부의 제1지대에 소속되었다. 당원의 강령은 “1. 우리는 주의 사상을 초월, 오직 3.1 정신을 받들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원수의 일본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2. 우리는 중지를 모아 직간접으로 일본 군부를 내부로부터 교란, 일본의 패망을 추진한다. 3. 우리는 힘을 모아 무장봉기하고 사태가 여의치 못할 땐 백두산으로 들어간다. 4. 우리의 최종목표는 오직 독립이요, 자치권이나 참정권 따위는 고려의 여지가 없다” 등이었다.부대 탈출 전략과 전술에 대하여 수차례 회의한 결과 전상엽 등 급진파의 주장은 평양사단 병영 폭파였지만 탄약과 폭약 입수가 어렵고 인원이 부족한 문제가 있었다. 다른 주장은 먼저 부대 탈출 후 한만 국경지대나 함남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자는 것이었는데, 이에 탈출 후 게릴라전을 벌이고 기회를 보아 평양사단을 폭파하자는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이로써 최고지휘자 김완룡 휘하에 참모부를 두고 참모부 아래에 42부대원으로 편성된 제1지대와 44·47·48·50부대원으로 편성된 제2지대를 두었다. 여기서 제1지대 최정수 지대장 아래 제5분지대를 맡았다.탈출 시점은 달이 밝고 은폐가 용이한 시기인 10월 1일 추석 밤 12시로 정해졌고, 개별적으로 부대를 탈출한 뒤 양덕의 북대봉 기슭에 집합하고서 밤에 행군해서 최종 목적지인 함남 혜산군 보천보에 도착해 항일 게릴라전을 펼치는 것이었다.음악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나팔수로서 거사 당일 정해진 기상시간보다 이른 새벽에 기상나팔을 불어 일본군을 교란시켜 연병장으로 유인해 토벌하는 전술에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8월 25일부터 사흘 간 대규모 기동훈련이 잡혀 부대원 절반이 함남 부전고원으로 떠나게 되어 부득이 거사일이 11월 1일로 연기되었다.9월 1일부터 14일까지 42부대의 제2회 경기관총 수업병 집합교육이 실시되었는데, 우연히 병사(兵舍) 뒷길로 말을 끌고 가는 무사시노음악학교 동창인 47부대 김세균(金世均)을 만나게 되었다. 김세균을 통해 47부대 내부의 학도병 동정을 들었고 상호 간에 긴밀한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그런데 9월 중 47포병부대 노영준이 추을헌병대에 있는 동창 임영호를 만나 탈출 계획을 알려주고 협조를 부탁했는데, 뜻밖에 임영호의 밀고로 학도병들이 헌병대의 감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9월 25일 김완룡이 일본인 상관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헌병대로 끌려가 조사받는 과정에서 평양학병의거 계획의 전모가 드러나서 10월 24일 관련자 모두 적발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고문 후유증으로 옆구리에 큰 인두 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1945년 6월 10일 평양군관구 임시군법회의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으로 출옥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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