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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835
성명
한자 金完龍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44. 1 학도병(學徒兵)으로 일군(日軍)입대(入隊)(後) 독립운동(獨立運動)목적(目的)으로 동지(同志)규합(糾合)하여 집단(集團) 탈출(脫出)모의(謀議) 거사 계획(擧事計劃)체포(逮捕)되어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위반(違反)으로 징역 9년형(年刑)언도(言渡)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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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함남 함흥(咸興) 사람이다. 1941년 12월 일본 중앙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일본대학 연구실에 적을 두고, 귀국하던 길에 일경의 강압에 의해 1944년 1월에 일본군 평양사단내 42부대에 강제 징병되었다. 이무렵 일제는 전쟁에 광분하여 소위 '조선인학도 육군특별지원병 제도'란 명목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그들의 전선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학병지원은 어디까지나 표면상 지원이었지 실제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일군 평양사단은 42·43·44 보병부대 및 47포병부대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 부대에 각기 배속되었던 학병들은 동년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부대를 중심으로 집단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때 그 조직의 총책임을 맡았던 박성화(朴性和)·최정수(崔正守)·전상엽(全相燁)·김윤영(金允永) 등과 함께 모의를 거듭하여 동년 8월부터는 동지를 포섭하는 등 항거 준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평양사단내 각부대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다. 평양사단 학병의 항쟁계획으로는 평양사단 병영의 폭파 등이 제의되었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웠으므로 일단 부대탈출 후 한만 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학병의거를 탐지한 한인 헌병보조원이 이러한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또 그가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사건으로 인하여 평양사단의 학병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6월 일군 군법회의에서 징역 9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45. 6. 10 조선군관구 임시군법회의 평양사관구법정)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1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3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39·84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663·66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완룡 - 함경남도 함흥(咸興) 평양학병사건(平壤學兵事件)
본문
1918년 7월 1일 함경남도 함흥(咸興)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함흥 지역의 지주인 김보희(金普熙)이다. 일본 중앙대학(中央大學) 법학부를 졸업 후 1944년 일본 경찰에 의해 강압적으로 학도지원병에 가게 되어 평양사단에 입영하게 되었다.1943년 창설된 평양사단은 42보병부대, 43보병부대(함흥주둔), 44보병부대, 47포병부대, 48공병부대, 50치중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1944년 1월 입영 후 제42보병부대에 배치되었다. 소수 인원으로 분산 배치된 학도병들은 서로 말도 걸지 못하고 훈련 때에나 만날 수 있는 감시 상황 속에서 불만이 쌓이게 되었다. 또한 일본 출신 고참병들로부터 심한 민족적 차별과 멸시를 당하면서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내선일체(內鮮一體)’ 라는 말의 허구성을 깨달아 갔다.1944년 중순부터 일본의 연이은 패전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6월 한국 상공에 B-29가 출현하고 마리아나 해전을 비롯한 여러 전선에서 일본군이 패배를 거듭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평양사단에 입대한 학도병의 대부분이 이미 중국으로 파견되고 남은 학도병마저 곧 중국으로 파견될 예정이라는 상황이 맞물려 평양사단 내 학도병들 내에는 부대를 탈출하고자 하는 논의가 일어났다.1944년 7월 제42보병부대 내 한국인 학도병들을 규합하여 삼천당(三千黨)을 결성할 것을 제의하여 동조를 얻고, 조직을 구성하였다. 강령은 첫째,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에 대항해 투항할 것, 둘째, 일본 군부를 내부로부터 교란하여 일본의 패망을 추진할 것, 셋째, 힘을 모아 무장 봉기하고 만일의 사태 때는 백두산(白頭山)으로 들어갈 것, 넷째 자치권과 참정권은 결코 고려치 않고 최종적 목표는 오로지 독립이라고 하여 성격을 명확히 하였다. 이 결사는 곧 타 부대의 한국인 학도병에게도 알려져 44부대, 47부대, 48부대, 50부대 내 학도병들과 연계한 조직이 구성되었다.이들은 부대를 탈출하여 한만(韓滿) 국경 지대와 부전고원(赴戰高原)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10월 1일 탈출을 결행하고자 계획하였다. 평양 학병 의거를 위해 최고지휘자를 맡아 지휘 체계는 최고지휘자로 그를, 참모장으로 박성화(朴性和), 작전참모 전상엽(田相燁), 보급참모 최홍희(崔泓熙), 정보참모 이도수(李道秀), 그 아래 제1지대-각분지대, 제2지대-각분지대로 조직체계를 구성하였다. 개별 탈출 동선과 규합, 식량과 무기의 확보, 게릴라전 계획, 국제 정세 등을 모두 염두에 둔 계획이었으나 평양사단이 함남 부전고원으로 대규모 기동훈련을 떠나게 되면서 거사일을 11월 1일로 미루게 되었다.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고 있던 47부대의 노영준(盧永濬)은 도움을 받고자 추을헌병대의 보조 헌병 임영호(林永鎬)에게 이를 알리고 동지를 규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임영호는 이 계획을 헌병대 상부에 알리게 되고, 헌병대는 학병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외출 도중 일본군 상등병과 시비가 붙어 헌병대에 연행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평양사단 학도병들이 대대적으로 헌병대에 잡혀가게 되고 곧 탈출 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헌병대에서 학도병들은 5개월에 걸쳐 모진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1945년 6월 10일에는 조선군관구임시군법회의(朝鮮軍管區臨時軍法會議)가 평양사관구법정(平壤師管區法庭)에서 열리게 되면서 이들은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징역 9년을 받고 군적에서 박탈되어 민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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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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