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진주(晋州) 사람이다. 진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신간회(新幹會) 본부 청년부 간사로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평양(平壤)에서 대성고등보통학교(大成高等普通學校) 4학년에 재학중에는 학우들과 함께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발각되어, 만주(滿洲)로 망명하였다. 1907년(융희 1)년 의병장 유종환(兪宗煥)과 함께 전북 무주(茂朱)·충북 황간(黃澗)·영동(永同) 등지로 다니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기를 모은 후, 이해 4월 중순경, 전라도와 경상도의 접경지인 대덕산(大德山) 기슭에서 함안(咸安) 일본군 수비대와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만세 의거 소식을 듣고, 이강우(李康雨)·김재화(金在華)·권채근(權采根)·강달영(姜達永)·박용근(朴龍根)·강상호(姜相鎬) 등과 만나 진주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그 시일과 구체적인 거사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그는 사회단체의 교섭을 맡았다. 3월 18일 그는 모여든 3만여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곧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출동한 일본 경찰은 주동 인물들에게 잉크를 뿌려두었다가 그것을 증거로 관련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되었고, 김재화·강달영과 함께 조직한 걸인독립단(乞人獨立 )·기생독립단(妓生獨立 )·노동독립단(勞動獨立 ) 까지 나타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그후에 체포되어 이해 9월 6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1927년 1월 19일에는 신간회 창립 발기인 대회를 열어 청년부(靑年部) 간사로 선출된 후, 독립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1929년 2월 15일에는 신간회 창립 제2주년 기념 전국대회 개최를 방해하려는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대표자 회의에서 진주군 대표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1928. 3. 29)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76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3면
- 판결문(1919. 6. 17 대구복심법원)
- 고등경찰관계적록(경남경찰부) 1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70·289·29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