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경북 청도(淸道) 사람이다.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박상진(朴尙鎭)·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경북 대구(大邱)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동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들이 참여하여 사립교육기관과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7월 15일에 풍기(豊基)의 광복단(光復團)과 조직을 합쳐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집, 그리고 무기구입을 목적으로 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발전하였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1월 대구의 광복회 조직이 노출되어 일경에 붙잡혔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동년 10월에 석방되었다. 그는 1920년에 고향인 청도군 매전면(梅田面) 온막동(溫幕洞)에 온명학원(溫明學院)을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1921년에 경성북도 초대 평의원(評議員)으로 당선된 후 임시정부(臨時政府) 후원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1922년 일경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하여 항일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고등경찰요사 176·182·21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20면
- 동아일보(1922. 12. 17, 12. 20, 12. 23, 12. 30)
- 예심종결결정서(1918. 10. 19 공주지방법원)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747·74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