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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453
성명
한자 閔泳秀
이명 金成浩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광복군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40.9.17~1945.8.15까지 광복군총사령부에 입대하여 총사령부에서 근무 중 중국 중앙육군 군영학교(中國中央陸軍軍營學校) 18기 졸업하고 서안(西安)에 있는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본부요원(대위)로 근무 항일운동한 바 있고 한미연합특수훈련(韓美聯合特殊訓練)(O.S.S)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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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서울 종로(鍾路) 사람이다.

부친인 민필호(閔弼鎬)가 임시정부를 수립하던 때부터 독립운동을 한 관계로 중국 상해(上海)에서 출생하여 학교교육을 받으면서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이 창설되자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 18기로 졸업한 후 총사령부에 근무하다가 1945년에 광복군 제2지대에 파견되어 총무조원으로 근무하였다.

광복군 제2지대는 1945년 5월부터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을 시작하였는데 이 훈련은 광복군의 정예대원에게 3개월간 특수작전에 필요한 정보 파괴, 무전공작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광복군의 목표는 OSS훈련이 끝나는 즉시 연합군과 공동작전하여 잠수함 또는 비행기로 국내에 침투하여 일본군의 군사시설을 탐지하고 연합군 항공기의 공격을 유도하는 한편 현지의 주민들을 포섭하여 거점을 구축하며 애국청년을 규합, 왜적의 주요시설을 파괴하면서 미군의 상륙과 때를 맞춰 국내에서 궐기하여 우리 힘으로 일본군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총사령부는 특수훈련이 거의 끝나 가는 8월초 국내 진입작전을 위한 부대 편성에 착수하였고 8월말에 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그는 총지휘관인 이범석(李範奭)의 수하에서 이재현(李在賢)·김석동(金奭東)·이윤장(李允章) 등과 함께 본부요원이 되어 OSS훈련에 참가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2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93·266·610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81·858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84면
  •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1권 31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94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95 61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민영수 왕영수(王永秀) 서울 -
본문
1921년 6월 21일 중국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에서 아버지 민필호(閔弼鎬)와 어머니 신명호(申明浩)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경술국치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중국정부 기관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고, 어머니는 신규식(申圭植)의 따님으로 신규식의 외손자가 된다. 이명으로 왕영수(王永秀)를 사용하였다.어려서 상하이에서 자랐고, 한인들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를 다녔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가 결행된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항저우(杭州)로 이동하였다. 항저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이 항저우를 공격해오자 가족들과 함께 덕청현(德淸縣)과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을 거쳐,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가서 임시정부와 합류하였다. 1938년 7월 임시정부와 함께 광저우(廣州)로 이동하였다가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이 류저우(柳州)로 다시 옮겨갈 때,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가 근무하고 있던 구이린(桂林)으로 갔다. 구이린에서 월남(越南, 현 베트남) 하노이를 거쳐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서 고등학교를 다녔다.1940년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重慶)으로 갔다. 1941년 4월 송면수(宋冕秀)·김원영(金元英)·유진동(劉振東)과 함께 청두(成都)에 있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청두분교에 입교하였다. 이때 중국식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여 왕영수라고 바꾸었다. 교육 훈련을 받던 중 김원영은 중국공군에 지원하였고, 유진동은 중도에 그만두었다. 3년 동안 훈련을 받고 송면수와 함께 1943년 6월 제18기로 졸업하였다. 청두군관학교에 다닐 때, 한국광복군 제2지대 총무조 조원으로 편제되었다.졸업 후 충칭에 있는 광복군 총사령부에 배속되어 1년 동안 복무하였다. 광복군 사직원을 내고 중앙정치학교에 들어갔다.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역할하던 한국독립당에 들어가 당원이 되었다. 1944년 6월 임시정부 선전부 총무과 과원으로 임명되어, 그 해 11월 20일까지 근무하였다.1945년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가서 광복군 제2지대에 편제되었고, 조장 송면수와 더불어 정훈조 조원으로 활동하였다. 8월 4일 OSS훈련이 완료되면서, 제2차로 OSS작전 수행을 위해 대기하다가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광복군에서 국내에 진입하기 위한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이 편성되자, 이재현(李在賢)·김석동(金奭東)·이윤장(李允璋) 등과 본부 요원으로 임명되었다.광복 후 난징에서 아버지를 도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의 단원으로 근무하였다. 주화대표단은 임시정부가 환국하면서 중국 정부와의 교섭을 위해 설치한 일종의 주중대사관이었고,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활동과 귀국을 주선하는 활동을 담당하였다. 장제스(蔣介石)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갔다가, 1949년 귀국하였다.1953년 타이페이 총영사관 영사관보로 시작해 1962년 주 캄보디아 영사, 1969년 중화민국 대사관 참사관, 1970년 외교연구원 상임연구원, 1973년 홍콩 부총영사, 1981년 중화민국 공사, 대리대사를 역임하였다. 특히 중국에서 중국군과 광복군으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중화민국·홍콩 등지에서 근무하였고, 외교연구원에서 중국문제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한편 광복회 사무국장, 독립유공자협회 회장, 독립기념관 이사장 등도 역임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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