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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44
성명
한자 金炳宇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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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3.1 운동 당시 안동(安東) 독립만세시위 주모자의 일인으로 거사준비하고 만세선창 항일투쟁 등 활약하고 징역 2년을 언도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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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안동(安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과 23일의 안동읍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기독교도(基督敎徒)와 천도교도(天道敎徒)가 연합함으로써 대대적으로 거사되었는데, 그는 김익현(金翊顯)·황인규(黃仁圭)·김계한(金啓漢)·김재성(金在成)·이인홍(李仁洪) 등과 함께 기독교도의 대표로서 천도교도와 비밀연락을 취하면서 거사계획을 추진하였다.

3월 18일 오후 6시경 그는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하고, 이튿날 오전 1시경에는 또 다시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군청·경찰서·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등으로 몰려가서 애국지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이다가 일제의 발포로 부득이 해산하였다.

그후 다음 안동 장날인 23일에는 더욱 격렬한 제2차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그는 이날 오후 8시경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읍내 중심지를 향하여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때 일본 군경이 공포를 발사하며 저지하려 하였으나 시위군중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경찰서·지방법원 안동지청을 포위하고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무자비하게도 사격을 감행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행하고 시위군중은 해산하였다. 일제의 주동자 색출에 혈안이 되어 검거를 시작하였으며 그도 마침내 체포되어 이해 5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98면
  • 판결문(1919. 5. 2 대구복심법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병우 - 경상북도 안동(安東) 안동면 만세시위
본문
1879년 11월 7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남면(豊南面) 어담리(魚潭里)에서 김신근(金信根)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여러 형제 중 가장 역할을 하며 집안을 이끌어나갔다고 한다. 1897년 12월 19일 19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더욱 큰 책임을 지게 되었다. 1902년 권계백(權季伯)의 전도를 받아 대구 남성교회(南城敎會)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안의와(安義窩, James. E. Adams)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동시에 고향에 풍산교회(豐山敎會)를 설립하여 영수(領袖)로 활동하였다. 1907년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가정 형편 때문에 3개월 만에 중퇴하고 귀향하였다. 5일 만에 모친상을 당하여 상례(喪禮)를 마친 뒤 전답을 팔아 사립 고창학교(高昌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교과서 및 학용품을 구입하여 무료로 배부하는 등 육영 사업을 펼쳤다. 한편으로는 기독교 전도 및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설립하는 등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08년 11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오월번(吳越璠, 웰빈, A. G. Welben)의 요청에 따라 안동으로 이주하여 성서서점(聖書書店)을 운영하였다.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安東敎會)를 설립하여 영수로 시무하는 한편, 사립 계명학원(啓明學院)을 설립하였다. 1911년 안동교회의 장로(長老)로 취임하였다. 1919년 안동의 만세 시위는 도쿄 유학생 강대극(姜大極)의 귀국과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생인 둘째 아들 김재성(金在成)의 귀향으로 시작되었다. 안동 군청 서기 김원진과 함께 도쿄에서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한 강대극을 만나 3월 13일 안동면 장날 거사를 논의하였으며, 또 둘째 아들 김재성이 서울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보고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3월 12일 김원진(金元鎭)·강대극·김영옥(金泳玉)·이중희(李重熙) 등이 예비 검속되면서 무산되었다. 다행히 예비 검속을 면한 후에는 김익현(金翊顯)·김계한(金啓漢)·황인규(黃仁圭)·권점필(權點必)·이인홍(李仁洪) 등과 함께 다시 3월 18일 안동면 장날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유림 측의 송기식(宋基植)과 논의하는 한편, 협동학교(協東學校)·보문의숙(寶文義塾)·동화학교(東華學校)의 교사와 학생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안동교회에서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하였다. 3월 18일 낮 12시 안동교회의 기독교인 30여 명과 함께 삼산동(三山洞) 곡물전(穀物廛)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곧이어 송기식을 비롯한 유림 측 인사들이 합류하여 안동 시내 곳곳을 다니며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 시위에서 주동자 14명이 체포되고 나서 시위 군중은 일단 해산하였다. 오후 6시경 기독교도 60여 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다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점차 시위 군중이 증가하여 3월 19일 0시 50분 무렵에는 2,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 군중과 함께 군청·경찰서·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등에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둘째 아들 김재성과 함께 경찰에게 붙잡혀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5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9년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면서 대구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안동 지역의 기독교 전파와 농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3월 안동 법상동교회 신축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934년 8월 안동 지역의 이재민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35년 3월에는 법상동(法尙洞) 농촌진흥조합(農村振興組合) 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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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2년(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형사제2부 1919-05-02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6-05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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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안동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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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2 비석 안동 3·1운동 기념비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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