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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409
성명
한자 姜遠馨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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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년도 1980 훈격 독립장
1905년이후 유생(儒生)의 총대표기구인 13도유약소(道儒約所)수좌(首座)로서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후 3회에 걸친 구국 상소(救國上疏)와 5회에 걸친 국민여론을 집약한 항서투쟁(抗書鬪爭)으로서 2회의 옥고(獄苦)를 겪어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서 활동하다가 분사(憤死)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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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지천(枝川)면 신동(新洞)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만행이 자행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상소를 올렸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 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해서 내정을 간섭하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그 수좌(首座)가 되어 일본공사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반성을 촉구했으며, 일본이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때에는 결사적으로 이에 맞서 싸울 결의를 전달하였다. 1905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전참판 최익현(崔益鉉), 전판서 김학진(金鶴鎭), 비서승 허 위(許蔿) 등 3인을 일제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격문을 돌렸다 하여 구속하자, 강원형은 일본군 사령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13도유약소의 대표로서 각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교활한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3인의 구속에 대한 공개담판을 요구하였다. 강원형 등의 이러한 운동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강원형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5일간 구속되었다.

1905년 5월에 석방된 후에도 일본의 배신과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항의공함을 일본 공사관에 여러 차례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13도 유생 연명소(聯名疏)에 소수(疏首)가 되어 상소를 올리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고, 일본 공사의 횡포무례를 엄징할 것을 요구했으며, 같은 뜻을 시민들과 세계에 성명하여 시민들의 국권회복에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투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8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3면
  • 고종시대사(국사편찬위) 38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4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109면
  • 황성신문 1905. 1. 16 3. 14 3. 16 6. 20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56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원형 자 : 성윤(聖允), 호 : 혜사(蕙社) 경북 칠곡(漆谷) 을미사변,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본문
1862년 2월 19일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지천면(枝川面) 신리(新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성윤(聖允), 호는 혜사(蕙社)이다. 1890년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가 되었고, 1906년 2월에는 홍문관(弘文館) 시강(侍講)에 임명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를 규탄하는 상소 「청환어겸진구폐(請還御兼陳救弊)」를 올렸다. 이 상소는 아관파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내용은 첫째 고종의 환궁과 국가 위신의 회복, 둘째 구제도 혁신, 셋째 충성스럽고 재능 있는 인재 등용, 넷째 토지제도 개혁, 다섯째 근검절약을 통한 국가 재정 확보와 올바른 예산 집행 등이다.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의 이름으로 우용택(禹龍澤)·여중룡(呂中龍) 등과 함께 일본 공사에게 「기일공사서(寄日公使書)」라는 서한을 보내 제1차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에 따른 일본의 침략 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면서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때는 결사적으로 맞서 싸우겠다는 결의를 전달하였다. 같은 해 3월 14일 일본 헌병대가 침략에 대한 규탄 격문을 돌렸다는 이유로 전 판서 김학진(金鶴鎭), 전 참판 최익현(崔益鉉), 비서승 허위(許蔿) 등을 구속하였다. 이에 여중룡·우용택 등 영남 유생과 함께 일본군 사령부에 「여일본군사령부공함(與日本軍司令官公函)」이라는 서한을 보내 3인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한편, 한국의 자주독립(自主獨立) 보장을 요구하였다. 이어 3월 16일에는 일본 공사관과 각국 공사관에 여중룡·우용택·김호규(金濩圭) 등과 함께 2천만 민족대표의 이름으로 「기각국공사관서(寄各國公使館書)」라는 공함(公函)을 보냈다. 이 공함들은 일제의 야만성을 지적하고 3인에 대한 공개 담판을 요구한 것이다. 이 투서로 인해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5일간 구속당하였으나 3인은 석방되는 결과를 얻었다. 그해 3월 21일 다시 일본 공사관에 「투일공관서(投日公館書)」이라는 공함을 보내 국권침탈을 항의하고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시정개선(施政改善)이 충고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협잡기만(挾雜欺滿)을 위한 술책임을 지적하며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반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4월 5일에는 다시 각국 공사관에 「공함 영미법덕청각사관(公函英美法德淸各使館)」이라는 공함을 보냈다. 그 내용은 “근래 일본이 러·일 개전 이래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보전하겠다고 공포한 것은 만국이 모두 아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국에 대해 야만적인 폭행을 행하고 있으나 문명 세계는 방관하고 있으니, 각국은 일본을 개전(改悛)시키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라”라는 것이었다. 5월 16일에는 여중룡·우용택 등과 함께 일본 공사관에 장서 「투일공관서」를 보내 일본의 배신과 횡포, 착취를 질책하고 한국을 돕고 중국과 친교하여 동양 연합을 달성하도록 권고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에 분개하여 13도 유생의 연명소에 소수(疏首)가 되어 「청파오조약참제적신(請罷五條約斬諸賊臣)」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의 내용은 “임금의 윤허나 재가도 없고, 수상의 거부와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력으로 여러 대신이 조인에 가(可)라고 쓴 것은 오직 일본인들이 위협해서 강제로 시행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또 “조인에 가라고 쓴 것은 애초에 정부의 공적인 결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니 바로 이것이야말로 명분 없는 위조 문서이며 빈 종잇장”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역적들은 법부(法部)에 넘겨 그 목을 베고, 각국 공사관 공사(公使)들을 궁궐에 불러들여 모임을 열고 천하에다 그 죄를 성토”할 것을 청하였다. 이는 당시 을사늑약 반대소의 효시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월 다시 상소를 올렸다가 경무청에 구속되었다. 당시 함께 상소를 올렸던 김복한(金福漢)·장지연(張志淵) 등은 1906년 1월 24일 풀려났으나, 일본인 경관의 회유와 협박에 굽히지 않고 항거하였다. 4개월 동안 고초를 겪다가 1906년 3월 21일 풀려났다. 석방 이후 대한자강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상경하여 동지들과 함께 국권 회복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4년 9월 25일 순국하였다. 저술로는 『혜사문집(蕙社文集)』이 있다. 1956년 건립된 재실 혜사정(蕙社亭)이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심천리 산103번지에 있으며, 지천면 신리에는 1965년에 세워진 강원형애국지사기념비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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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대구광역시 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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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강원형 애국지사 기념비 경상북도 칠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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