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북 고창 신림(全北 高敞 新林) 출신이다.
을사(乙巳)년에 거의할 때 벼슬은 의관(議官)이었고,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의진에서 활약하였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석진은 면암과 뜻을 함께 하여 거사할 것을 꾀하였다. 면암은 이용원(李容元)·이도재(李道宰)·이성렬(李聖烈)·이남규(李南珪)·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 등의 인품 있는 관료들에게 함께 국난 타개의 길을 모색하자고 건의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해 일이 지연되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었다. 이때 고석진이, "태인(泰仁) 사람 임병찬(林炳瓚)이 이미 갑오년부터 비적(匪賊)을 토벌한 공이 있으니 그의 충의는 믿을 만합니다. 이 사람과 함께 모사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건의하였다. 임병찬은 일찍이 임실(任實)과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역임한 바 있는 학자적 관료일 뿐 아니라 1894년 동학농민군의 토벌에 참가하여 군사적 경륜을 쌓은 인물로 알려져 있어 면암의 참모로서는 적임자였다.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면암과 임병찬의 제휴가 이루어졌다. 이 일이 면암의 거사지가 태인 지방으로 결정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고석진과, 면암 임병찬을 축으로 하여 최제학(崔濟學)·최학령(崔學嶺)·이용길(李容吉)·손종궁(孫鍾弓)·김태원(金泰元)·임현주(林顯周) 등 의사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배제해 가면서 혹은 지방으로 연락하고 혹은 군수물자를 준비하여 시기를 기다리다가 1906년 5월 중순경 민종식(閔宗植) 의진이 홍주성(洪州城)으로 들어가 기세를 올리자 그것에 호응하여 궐기할 것을 서둘렀다.
면암 의진의 활약이 본격화된 것은 1906년 4월 1일(음력) 이었다. 최제학이 태인 종석산(鍾石山)으로 돈헌(遯軒) 임병찬을 만나 구체적인 계획을 의논하고 그 일대의 손석명(孫錫命)·이양호(李養浩)·이한부(李漢夫)·이하범(李夏範)·최학엽(崔學燁)·김태원·유종규(柳鍾奎)·권재일(權在一)·이용길·이정의(李禎義)·이서계(李西溪)·김청일(金淸一)·정시해(鄭時海)·송기덕(宋基德) 등과도 군사상의 문제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협의하였다. 4월 12일 최제학이 진안(鎭安)의 삼우당(三友堂)으로 돌아와 면암에게 복명하여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였다. 일찍이 이호용(李浩鎔)·김종진(金鍾振)·이경찬(李敬贊) 그리고 최제학 등은 군사 20명과 총 200정 등의 군사적 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모두 합하여 80명의 병정과 9백 자루의 총을 준비할 수 있었다. 4월 15일 드디어 면암은 군사를 거느리고 태인을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임실(任實)을 거쳐 백여치(白如峙)에 이르렀을 때 임병찬의 아들 응철(應喆)과 손자 진(鎭)이 김태원·임현주·김경하(金敬河)·오상철(吳相喆) 등을 거느리고 와서 의진을 맞이하여 종성리(宗聖里)에 당도한 것이 4월 16일이었다. 고석진은 최학엽·노병희(魯炳熹)·고제만(高濟萬) 등과 함께 종성리에서 의진을 맞이하였다.
처음에 거사 날짜를 윤 4월 초6일로 확정하고 일을 경영하였으나 계획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임병찬은 농번기를 피하여 가을에 거사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면암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윤 4월 13일 거사할 것으로 확정하고 일의 성패(成敗)는 따지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4월 13일 면암이 문하생 수십 명을 거느리고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도착하여 최고운(崔孤雲) 선생 영정을 봉심(奉審)하고 이어 강회(講會)로 들어갔다. 강회를 마치자 면암은, "나는 구신(舊臣)의 처지에 있어 진실로 종묘 사직과 미생의 화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므로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대의를 만천하에 외치고자 함이요, 성공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사생을 초월한다면 천지신명이 반드시 도울 것이니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상대하는 그대들은 모두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하였다. 고석진을 비롯한 지사들이 생명을 걸고 맹서하였다.
의진은 이튿날인 4월 14일 아침부터 행군하여 정읍(井邑) 한교(閑橋)에 이르러 모군하니 백여 명이 합세하였다. 이때 고석진은 김재구(金在龜) 강종회(姜鍾會)와 함께 포군 30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성세가 더욱 떨쳤다. 이미 의진의 수는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날은 내장사(內藏寺)에서 유숙하고 15일 아침 군사 훈련을 마치고 순창(淳昌) 귀암사(龜巖寺)로 들어갔다. 4월 16일 순창읍으로 들어가 총포와 포수를 보완하고 쫓아온 왜병을 성밖에서 물리쳤고, 17일 곡성(谷城)을 거쳐 18일 남원(南原)으로 향하려다 군대가 기다리고 있다 하여서 순창으로 향하던 중 오산촌(鰲山村)에서 유진하였다. 19일 관군과 결탁하여 의병을 궁지에 몰려고 하던 순창군수 이건용(李建鎔)을 붙잡았다. 면암이 죽이고자 하였으나 좌우가 만류함으로 선봉장으로 삼아 휘하에 두었다.
20일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시문(告示文)이 내도하였고,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鎭衛隊)에 포위되자 면암은 선비들을 해산시켰다. 모두 돌아가고 22명만이 남아 면암을 호종하였다. 드디어 관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면암 등은 동족끼리 박해할 수 없다 하여 앉아서 기다리던 중 유탄이 날아와 정시해가 순국하였다. 시체를 아랫방으로 옮겨 놓고 앉으니 고석진을 위시하여 모두 13인이었다. 윤 4월 23일 그대로 앉아 적을 꾸짖다가 잡혀서 서울로 호송되었다. 서울에는 홍주 의진의 80여 명이 이미 잡혀 와 있었다. 오랜 취조 끝에 6월 25일 고석진은 4개월 감금 선고를 받았다.
그 밖에 면암은 3년, 임병찬은 2년 대마도 유형 선고를 받았고, 최재학은 4개월, 양재해·이용길·임현주·김기술·문달환·조두식·조영선·유해용·나기덕 9인은 각각 태(笞) 1백대를 선고받았다. 10월에 사령부로부터 석방된 고석진과 최제학은 면암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임병찬의 전보를 받고 면암의 장남 영조(永祚)와 함께 수의를 준비해 가지고 부산으로 달려갔다. 11월 5일 대마도에 도착하여 면암을 면회할 수 있었다. 다시 부산으로 나와 몇 가지 약재를 준비하고 면회하고자 할 때 11월 17일 이미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부산에서 설위 망곡(設位望哭)하였다. 1910년 임병찬이 고종(高宗)의 밀명을 받고 재기하자 다시 참모관(參謀官)이 되어 활약하였으며, 1914년 2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참모총장(參謀總長)의 칙명을 받아 활약하였다. 1919년에는 다시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계속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기려수필 102면
- 매천야록 382·38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69·37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93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56·57·60·62·68·75·84·85·86·87·88·89·90·91·92·93·94·95·102·216·22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