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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高石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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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06년 최익현 선생(崔益鉉先生) 태인 의거 시(泰仁義擧時) 참모(參謀)로서 활약한 것을 비롯하여 임병찬 의거 시(林炳贊義擧時) 참모장(參謀長)을 역임하는 등 현저한 공적과 4개월의 구류형(拘留刑)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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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북 고창 신림(全北 高敞 新林) 출신이다.

을사(乙巳)년에 거의할 때 벼슬은 의관(議官)이었고,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의진에서 활약하였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석진은 면암과 뜻을 함께 하여 거사할 것을 꾀하였다. 면암은 이용원(李容元)·이도재(李道宰)·이성렬(李聖烈)·이남규(李南珪)·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 등의 인품 있는 관료들에게 함께 국난 타개의 길을 모색하자고 건의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해 일이 지연되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었다. 이때 고석진이, "태인(泰仁) 사람 임병찬(林炳瓚)이 이미 갑오년부터 비적(匪賊)을 토벌한 공이 있으니 그의 충의는 믿을 만합니다. 이 사람과 함께 모사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건의하였다. 임병찬은 일찍이 임실(任實)과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역임한 바 있는 학자적 관료일 뿐 아니라 1894년 동학농민군의 토벌에 참가하여 군사적 경륜을 쌓은 인물로 알려져 있어 면암의 참모로서는 적임자였다.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면암과 임병찬의 제휴가 이루어졌다. 이 일이 면암의 거사지가 태인 지방으로 결정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고석진과, 면암 임병찬을 축으로 하여 최제학(崔濟學)·최학령(崔學嶺)·이용길(李容吉)·손종궁(孫鍾弓)·김태원(金泰元)·임현주(林顯周) 등 의사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배제해 가면서 혹은 지방으로 연락하고 혹은 군수물자를 준비하여 시기를 기다리다가 1906년 5월 중순경 민종식(閔宗植) 의진이 홍주성(洪州城)으로 들어가 기세를 올리자 그것에 호응하여 궐기할 것을 서둘렀다.

면암 의진의 활약이 본격화된 것은 1906년 4월 1일(음력) 이었다. 최제학이 태인 종석산(鍾石山)으로 돈헌(遯軒) 임병찬을 만나 구체적인 계획을 의논하고 그 일대의 손석명(孫錫命)·이양호(李養浩)·이한부(李漢夫)·이하범(李夏範)·최학엽(崔學燁)·김태원·유종규(柳鍾奎)·권재일(權在一)·이용길·이정의(李禎義)·이서계(李西溪)·김청일(金淸一)·정시해(鄭時海)·송기덕(宋基德) 등과도 군사상의 문제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협의하였다. 4월 12일 최제학이 진안(鎭安)의 삼우당(三友堂)으로 돌아와 면암에게 복명하여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였다. 일찍이 이호용(李浩鎔)·김종진(金鍾振)·이경찬(李敬贊) 그리고 최제학 등은 군사 20명과 총 200정 등의 군사적 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모두 합하여 80명의 병정과 9백 자루의 총을 준비할 수 있었다. 4월 15일 드디어 면암은 군사를 거느리고 태인을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임실(任實)을 거쳐 백여치(白如峙)에 이르렀을 때 임병찬의 아들 응철(應喆)과 손자 진(鎭)이 김태원·임현주·김경하(金敬河)·오상철(吳相喆) 등을 거느리고 와서 의진을 맞이하여 종성리(宗聖里)에 당도한 것이 4월 16일이었다. 고석진은 최학엽·노병희(魯炳熹)·고제만(高濟萬) 등과 함께 종성리에서 의진을 맞이하였다.

처음에 거사 날짜를 윤 4월 초6일로 확정하고 일을 경영하였으나 계획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임병찬은 농번기를 피하여 가을에 거사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면암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윤 4월 13일 거사할 것으로 확정하고 일의 성패(成敗)는 따지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4월 13일 면암이 문하생 수십 명을 거느리고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도착하여 최고운(崔孤雲) 선생 영정을 봉심(奉審)하고 이어 강회(講會)로 들어갔다. 강회를 마치자 면암은, "나는 구신(舊臣)의 처지에 있어 진실로 종묘 사직과 미생의 화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므로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대의를 만천하에 외치고자 함이요, 성공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사생을 초월한다면 천지신명이 반드시 도울 것이니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상대하는 그대들은 모두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하였다. 고석진을 비롯한 지사들이 생명을 걸고 맹서하였다.

의진은 이튿날인 4월 14일 아침부터 행군하여 정읍(井邑) 한교(閑橋)에 이르러 모군하니 백여 명이 합세하였다. 이때 고석진은 김재구(金在龜) 강종회(姜鍾會)와 함께 포군 30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성세가 더욱 떨쳤다. 이미 의진의 수는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날은 내장사(內藏寺)에서 유숙하고 15일 아침 군사 훈련을 마치고 순창(淳昌) 귀암사(龜巖寺)로 들어갔다. 4월 16일 순창읍으로 들어가 총포와 포수를 보완하고 쫓아온 왜병을 성밖에서 물리쳤고, 17일 곡성(谷城)을 거쳐 18일 남원(南原)으로 향하려다 군대가 기다리고 있다 하여서 순창으로 향하던 중 오산촌(鰲山村)에서 유진하였다. 19일 관군과 결탁하여 의병을 궁지에 몰려고 하던 순창군수 이건용(李建鎔)을 붙잡았다. 면암이 죽이고자 하였으나 좌우가 만류함으로 선봉장으로 삼아 휘하에 두었다.

20일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시문(告示文)이 내도하였고,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鎭衛隊)에 포위되자 면암은 선비들을 해산시켰다. 모두 돌아가고 22명만이 남아 면암을 호종하였다. 드디어 관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면암 등은 동족끼리 박해할 수 없다 하여 앉아서 기다리던 중 유탄이 날아와 정시해가 순국하였다. 시체를 아랫방으로 옮겨 놓고 앉으니 고석진을 위시하여 모두 13인이었다. 윤 4월 23일 그대로 앉아 적을 꾸짖다가 잡혀서 서울로 호송되었다. 서울에는 홍주 의진의 80여 명이 이미 잡혀 와 있었다. 오랜 취조 끝에 6월 25일 고석진은 4개월 감금 선고를 받았다.

그 밖에 면암은 3년, 임병찬은 2년 대마도 유형 선고를 받았고, 최재학은 4개월, 양재해·이용길·임현주·김기술·문달환·조두식·조영선·유해용·나기덕 9인은 각각 태(笞) 1백대를 선고받았다. 10월에 사령부로부터 석방된 고석진과 최제학은 면암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임병찬의 전보를 받고 면암의 장남 영조(永祚)와 함께 수의를 준비해 가지고 부산으로 달려갔다. 11월 5일 대마도에 도착하여 면암을 면회할 수 있었다. 다시 부산으로 나와 몇 가지 약재를 준비하고 면회하고자 할 때 11월 17일 이미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부산에서 설위 망곡(設位望哭)하였다. 1910년 임병찬이 고종(高宗)의 밀명을 받고 재기하자 다시 참모관(參謀官)이 되어 활약하였으며, 1914년 2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참모총장(參謀總長)의 칙명을 받아 활약하였다. 1919년에는 다시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계속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 102면
  • 매천야록 382·38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69·37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93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56·57·60·62·68·75·84·85·86·87·88·89·90·91·92·93·94·95·102·216·22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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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고석진 자 정여(貞汝), 호 수남(秀南) 전북 고창 파리장서
본문
1856년 1월 11일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정여(貞汝), 호는 수남(秀南)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과 거사를 도모하였다. 최익현이 이용원(李容元)·이도재(李道宰)·이성렬(李聖烈)·이남규(李南珪)·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 등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창의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한탄하자, 함께 의병을 일으킬 믿을만한 인물로 임병찬(林炳瓚)을 추천하였다. 그 건의가 받아들여져 최익현과 임병찬의 제휴가 이루어졌다. 또한, 최익현이 태인에서 거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병찬은 호남의 유명 향리 출신으로 낙안군수를 역임한 데다 1894년 동학농민군 진압에도 기여한 점이 참작된 것이다. 이후 최제학(崔濟學)·이용길(李容吉) 등과 함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군사를 모으고 무기를 마련하여 거의를 준비하였다. 1906년 5월 7일 최익현이 거의를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정산에서 출발하여 5월 8일 종성리(宗聖里)에 도착하자, 최학엽(崔學燁)·노병희(魯炳熹)·고제만(高濟萬) 등과 함께 의병을 맞이하였다. 당시 최익현 일행은 임현주(林顯周)·김경하(金敬河)·오상철(吳相喆), 임병찬의 아들 응철(應喆)과 손자 진(鎭) 등이었다. 5월 중순 민종식(閔宗植) 의병부대가 홍주성을 점령하자, 최익현은 봉기를 서둘렀다. 최익현은 창의를 알리는 상소를 올리고, 인근 지역에도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모집과 군기 수집에 전력을 기울였다. 5월 30일에는 최익현이 담양 추월산에서 기우만(奇宇萬)과 유생들을 만나 결의를 다지고 「동맹록」을 작성하자, 임병찬 등과 함께 연명하였다. 6월 4일 최익현이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하고 의병을 일으키자, 사생을 같이할 것을 다짐하고 80여 명의 지사와 함께 의병 대열에 합류하였다. 6월 5일 의병진이 정읍 한교(閑橋)에 이르러 100여 명을 모군하였다. 이때 김재구(金在龜)·강종회(姜鍾會)와 함께 전투력이 뛰어난 포군 30여 명을 모집하여 전력을 강화하였다. 의병진은 정읍을 점령한 후 구암사를 거쳐 7일 추격해온 일군을 물리치고 순창에 진을 쳤다. 그런데 6월 11일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조칙과 고시문이 도착하였다. 이후 의병 진압군인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가 의병진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최익현이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고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그는 20여 명과 함께 끝까지 남아 최익현을 호종하였다. 진위대의 공격으로 정시해(鄭時海)가 순국하고, 결국 붙잡혀 전주로 압송되었다. 다시 서울에 호송되어 일본군 사령부에서 가혹한 심문을 받고 4개월 형을 받았다. 이때 최익현은 3년, 임병찬은 2년간의 대마도 감금형을 선고받았다. 11월에 석방되어 그 직후인 12월 대마도에 가 최익현을 면회하였다. 1912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명을 받아 독립의군부를 결성하자, 참모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914년에는 독립의군부의 참모총장의 칙명을 받아 동지를 규합하고 전남과 전북의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정체가 발각되어 독립의군부는 와해하였다. 1919년에는 다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각 지방 유림의 서명운동을 전개할 때 호남 유림들의 서명운동에 앞장섰다. 파리장서(巴里長書)에 137명 중의 한 명으로 서명하였다. 이후 향리에 돌아와 교육 사업에 열중하며 학생들의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데 열중하였다. 1924년 12월 26일 별세하였다. 유고집으로 『방호집(方壺集)』(3권2책, 1935)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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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전라북도 고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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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 비 대구광역시 달서구
2 비석 (고창군)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 전라북도 고창군
3 사당 도동사 전라북도 고창군
4 비석 파리장서 비 경상남도 거창군
5 비석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 비 서울특별시 중구
6 비석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전라북도 정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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