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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358
성명
한자 金喆壽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일본방면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18 동경 유학생 학우회(學友會)조직(組織)하여 민족의식(民族意識) 고취항일사상(抗日思想) 앙양(昻揚)을 위하여 활동하는 한편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여 오다가 “동경(東京) 28학생독립선언”의 주동자로 체포(逮捕)되어 금고(禁錮) 9월형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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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경상남도 양산(梁山) 출신으로 일본 동경(東京)에서 재일 유학생들이 거행한 2·8독립선언식의 11명 대표중 한 사람이다.

일제에 의해 조국이 병탄되자, 재일 유학생들은 항상 조국 광복의 꿈을 키워 왔는데, 1916년 4월 17일 당시 재일 유학생은 모두 5백 24명으로서 일본경찰은 유학생들을 항일의식을 기준으로 하여 갑·을로 철저하게 감시하였다.

특히 재일 유학생들은 각종 비밀결사 단체를 통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그는 1915년 12월 신익희(申翼熙)·김양수(金良洙)·장덕수(張德洙)·최두선(崔斗善) 등이 발기하여 창립한 조선학회(朝鮮學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918년 1월 17일의 간부 개선 때 간사로 선출되었다.

이 해 12월 하순, 동경 조선기독교 청년회(東京朝鮮基督敎靑年會) 주최로 Y.M.C.A. 강당에서 웅변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때 연사로 나온 서 춘(徐椿)·이종근(李琮根)·김상덕(金尙德)·윤창석(尹昌錫) 등은 한결같이 민족자결주의 원칙 아래 자주독립을 획득할 것을 주장하였다.

웅변대회가 끝난 뒤, 유학생들은 해산하지 않고 조국 독립운동의 방안을 강구하였는데, 이 때 그는 최팔용(崔八鏞)·백관수(白寬洙)·김철수(金喆壽)·이광수(李光洙)·송계백(宋繼白)·최근우(崔謹愚)·서 춘·이종근·김상덕·윤창석 등과 대표위원으로 선발되어 그들과 함께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며 회합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신호(神戶)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영자신문인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의 1918년 12월 1일자 기사에 이승만(李承晩) 등의 한국대표가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들은 재일 유학생들은 이듬해 1월 상순에 모임을 갖고 최팔용·윤창석·송계백·최근우·백관수·김상덕·서 춘·전영택·이종근·김도연을 유학생 대표로 선출하여, 2월 8일을 기하여 재일본 동경 조선독립 청년단(在日本東京朝鮮獨立靑年團)의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본국의 민족 지도자들과의 연락을 위해 1월 중순에 송계백을 서울에 파견하였다.

이 때 그는 마침 전영택이 신병으로 유학생 대표에서 탈락하자, 이광수와 함께 11명 실행위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2월 8일 오후 2시, 4백여 명의 유학생들이 학우회 총회를 빙자하여 모두 Y.M.C.A. 강당에 모이자, 학우회 총회 의장인 백남규(白南奎)의 개회선언, 최팔용의 조선 청년 독립단 발족 동의, 김도연의 결의문 낭독을 마치고 서 춘이 연설을 하기 위하여 등단할 무렵, 동경 경시청에서 출동한 일본 경찰이 진입하여 해산을 요구하였다.

이에 흥분한 유학생들과 일본 경찰과의 격투가 벌어졌으나, 대다수의 참석 학생들이 체포되었는데, 그도 이때 체포되어 서신전(西神田) 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경시청으로 이감 기소되어, 이 해 6월 26일 제2심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9개월 금고형을 선고받고 동경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10월 18일 조선청년 연합회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1925년 10월까지 재일 유학생들의 독립운동과 물산장려 운동을 주도하는 등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 1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492·49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54·657·660·664·666·84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87·689·697·712·714·963·983·988·998·100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11·41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20·124·135·147·160·40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31·34·37·40·50·56·144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철수 호 : 춘제(春齊) 경상남도 양산(梁山) 2.8 독립선언, 물산장려운동
본문
1896년 5월 4일 경상남도 양산군(梁山郡) 상북면(上北面) 상삼리(上森里, 현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에서 아버지 김상형(金商炯)과 어머니 김월봉(金月鳳) 사이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춘제(春齊)이다.유년 시절 사립기장보통학교(私立機張普通學校, 현 기장초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가족이 동래군(東萊郡) 좌이면(左耳面)으로 이사하면서, 사립구명학교(私立龜明學校)(현 구포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졸업하였다. 이후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현 개성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17년 졸업한 후 일본 도쿄(東京) 게이오대학교(慶應大學校)에 입학하였다.게이오대학교 이재과(理財科)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1월 6일 일본 유학생들과 함께 도쿄 시내 조선 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웅변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서춘(徐椿)·최근우(崔謹愚)·박정식(朴正植) 등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독립운동을 실행할 실행전권위원 10명 중 한 사람으로 뽑혔으나, 이를 고사하고 앞으로의 독립운동 방침을 모색하였다. 1월 7일 이광수(李光秀)와 함께 대책위원으로 선정되었다. 비밀리에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고,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 준비에 착수하였다.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들과 함께 오전 10시경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도쿄에 주재하는 각국 대사관, 외국 통신원, 일본 정부 대신,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조선총독부, 신문사, 일본의 지식인 등에게 보냈다. 오후 1시에 조선 유학생 600여 명을 소집하여 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의결하였다. 이 때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에서 출동한 경관이 난입하여 60여 명을 체포할 때 함께 붙잡혔다.이후 방청이 금지된 비공개 재판에서 이른바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9월을 받고 도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일 출옥하였다.출옥 이후 국내로 돌아와 1920년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조직에 참여하였다. 조선청년회연합회에서 청년의 힘을 규합하고 청년 단체가 발전할 수 있도록 대중적 확산에 힘썼다.1923년 후반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장이 되어 농촌문제와 노동문제를 비롯한 사회문제로 활동 방향을 확대하고, 지방 청년단체에 지방대회를 통해 청년운동의 방향과 농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선소작인대회(全鮮小作人大會)’ 개최 등을 요구하였다.조선청년연합회는 평양에서 발족한 평양기독청년회의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강화하기 위하여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을 위한 전국적인 조직체 결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1934년부터 전조선물산장려회(全朝鮮物産獎勵會)의 창립을 준비하였다. 그 결과 1923년 1월 20일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가 창립되었다. 이 때 조선물산장려회의 초대 이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1945년 광복 이후 경상남도지사, 경남언론인협회 회장, 국민회 경남도회장, 3·1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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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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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양산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경상남도 양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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