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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8353
성명
한자 安炳瓚
이명 없음 성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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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896년 민비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으로 인한 전기(前期) 의병(義兵) 봉기시(蜂起時) 홍성지구(洪城地區)에 의병을 일으키어 주도하면서 1907년(9년간)까지 의병으로 활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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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안병찬의 본은 순흥(順興)이니 문성공 유(文成公 裕)의 후예이다. 1854년 안창식(安昌植)의 아들로 태어나서 청양(靑陽) 화성(化城)에 살고 있었다. 본래 성품이 강직하여 애매한 행동을 하지 아니하며 비록 일찍이 세력가에 출입하기는 했지만 학문에 힘썼기 때문에 그들과는 의리상의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1894년 안병찬이 홍주(洪州)의 교임(校任)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안병찬은 당시 초토사(招討使)로 파견된 이승우(李勝宇)와 함께 민요(民擾)를 평정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와 단발령 사건이 발발하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깃발을 올린 것은 충남 홍성에서였다. 안병찬 부자는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임한주(林翰周)·이근주(李根周)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적 만행에 분개하여 거사할 것을 의논하였다. 때마침 이승우가 동학운동 평정의 공으로 관찰사(觀察使)로 승진하여 와 있었다. 이들 의사(義士)들은 아무런 무력을 갖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승우의 협력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승우는 이해타산에 밝은 인물로서 승산 없는 의사들의 거사에 쉽사리 동조하려 들지 않았다. 이렇게 거사 계획이 지연되고 있을 때, 대흥(大興)·정산(定山) 등지에서 박창로(朴昌魯)·이세영(李世永)·이봉학(李鳳學)·송병직(宋秉稷)·이상린(李相麟)·이병승(李秉承)·김정하(金正河) 그리고 청양군수 정인희(鄭寅羲)·전 수사 조의현(趙儀顯) 등이 12월 1일(양 1월 5일)을 기하여서 군사를 거느리고 홍주로 들어오기로 약조가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1895년 11월 29일(양 1896년 1월 13일) 안병찬·채광묵(蔡光默) 등은 안창식이 모집해 놓은 민병 180명을 거느리고 홍주로 들어갔다. 이어서 박창로가 거느린 수백 명, 정인희가 보낸 이창서(李彰緖)의 군사 수백 명, 그리고 이세영·김정하·이봉학 등이 거느린 군사들이 혹은 장사꾼의 차림으로 혹은 무장으로 홍주성 내외에 이르렀다. 안병찬이 먼저 들어가서 이승우를 설복시키는 한편 일부 인사들이 관청에 호소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바로 들어가서 참서관(參書官) 함인학(咸仁鶴), 경무관(警務官) 강호선(姜浩善) 등을 체포하고 창의의 깃발을 조양문(朝陽門) 위에 높이 날리니 형세는 이미 결정되었다. 관찰사 이승우는 할 수 없이 홍주 목사 겸 창의 대장을 자원하고 각 고을 각 포구에 공문을 보내어 창의한 뜻을 밝혔다. 1895년 12월 3일(1월 17일) 김복한을 추대하여 수석을 삼고 홍주 관하 17군과 본부 27면에 통문을 띄워 독자나 노약호(老弱戶)를 제외하고는 매 호에서 군사 한 명씩을 내게 하였다. 이어서 각 부서와 작전계획을 세웠다.

선봉장:정인희 참모장:이세영 남면 소모관:채광묵·이창서·이봉학·이병승(李秉承)

서면 소모관:송병직

이들은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공주부(公州府)로 진격하고, 박창로·정제기(鄭濟驥)는 대흥 임존산성(任存山城)을 수리하게 하고, 각 소모관을 해당 지역으로 파견하여 군사를 모으게 하였다. 그리고 안병찬은 김복한·홍 건(洪楗)·이상린(李相麟)과 함께 성안의 창의소(倡義所)에 있었다. 을사 홍주의진은 모군(募軍)하는 데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내부 단속을 소홀히 하여 실패하게 되었다. 즉 관찰사 이승우는 형세에 이끌려 의병에 참여하였을 뿐이었다. 그의 그러한 뜻을 알고 전 승지 송언회(宋彦會)와 아전인 이주승(李周承)·이종헌(李鍾憲)·박봉흠(朴鳳欽) 등이 관찰사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이어서 온갖 방법으로 훼방하여 의병의 성내 수비를 교란시켰다. 이에 용기를 얻은 이승우는 12월 4일 김복한·이설을 잡아 가두었다. 그것을 알고 안병찬은 "이·김 2승지(承旨)가 만약 잡혔다면 정의는 항상 외로운 것이 아니니 여러분은 마땅히 나를 따라서 관문을 두들겨 부수고 구원해서 빼내 와야 할 것이다." 하고 외치며, 이상린과 더불어 용감하게 관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이들 두 사람과 임승주(林承周, 한주의 형) 역시 구금되고 말았다. 이튿날 송병직과 홍 건이 다시 붙잡혔다. 이렇게 홍주의진의 수뇌급이 모두 구금되자, 홍주의진의 기치 아래 모이고자 군사를 몰고 오던,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永)·남양부사(南陽府使) 남백희(南百熙)·대흥군수(大興郡守) 이창세(李昌世)·전 승지 김병억(金炳億) 등 수백 명의 군사들이 홍주 근처까지 왔다가 그대로 돌아갔다. 이로써 을사 홍주의진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들에 호응하였던 여러 군소 의진들은 고종의 의병해산 명령에 따라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구금된 안병찬은 처음에 김복한과 같은 방에 투옥되었다. 이때 김복한이 '실패하였으니 죽을 따름이다' 하고는 다른 곳으로 이감되어 갔다. 안병찬 역시 살 생각이 없어 칼을 뽑아 목을 쳤으나, 다행히 죽지 않고 다음날 아침에 깨어났다. 그는 목에서 흐르는 피를 손에 찍어서 다음과 같은 시를 혈서로 적어서 이승우에게 보내었다.

"지사(志士)는 죽어서 흙구덩이에 시신이 뒹구는 것을 잊지 않으며,

용사(勇士)는 목을 잃어버릴 것을 각오하는 법. 차라리 머리 잘린 귀신이 될지언정 머리 깎인 사람이 되지는 않으리."

(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 寧作斷頭鬼 不爲剃髮人)

글을 보고 놀란 승우가 살아서 부친을 만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고 달래면서 약을 쓸 것을 권하였으나, "곱게 죽을 따름이다. 이 물건을 어찌 사용하겠느냐" 하였으나 불효될까 두려워 차마 물리치지는 않았다. 한편 그가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의 부친 안창식이 읍내로 들어가려다가 친우들의 저지를 당하고 집으로 돌아가 군사를 모아 승우를 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역시 20일에 체포되어 단발(斷髮)을 강요받았으나 그의 강개한 이론에 승우 역시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1896년 1월 홍주의진에 연루되어 체포된 23인 중에 안병찬을 위시하여 김복한·홍 건·이상린·송병직·이설 등 6인이 서울 법부(法部)로 압송되고 나머지는 홍주에 구금되었다. 6인은 고등 재판소로 이송되어 이범진(李範晋)의 재판을 받게 되었다. 오랜 심문 끝에 김복한은 10년, 이설은 태 80대, 나머지 안병찬 등은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일찍이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이 '이들의 일은 명분이 정당하고 논리가 온당하므로 석방하는 것이 옳다'고 건의하여서, 고종이 '재판할 것도 없이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었다. 그래서 선고 내려진 날 밤으로 안병찬 부자를 비롯하여 홍주의진 관계자는 모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안병찬은 홍릉주사(洪陵主事)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고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일제의 침략야욕이 노골화하자, 그것을 결사 저지하고자 하는 운동이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안병찬은 을미의병 때의 동지였던 이설과 뜻을 모았다. 이미 신병으로 폐인이 되어 세상일에 간여하지 않기로 맹세한 김복한도 감복하여 이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상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안병찬은 "선비의 처사가 벼슬아치와 같을 수는 없다고 여겼고, 또 지금 죽이고 살리는 대권이 모두 저 왜놈들에게 옮겨졌으니 비록 천 장의 상소와 백장의 공문서를 올린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생각하고 군사를 일으키고자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6년 봄 군사 수천 명을 모아 합천(合川)에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왜병의 병참소(兵站所)가 사방에 널려 있고 일진회원이 곳곳에 있어서 패전하였다. 1906년 2월 23일 안병찬은 박창로(朴昌魯) 등 40여인과 함께 붙잡혀서 다시 공주로 압송되어 관찰서리(觀察署理) 곽 찬(郭 璨)의 문초를 받았다. 이때 병찬은 "결코 개화에 물들지 않을 것과 금수가 되는 것을 면할 것을 도모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위정척사 사상(衛正斥邪 思想)은 조금도 굴절되지 않은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때 구금되어 있던 상황에 대하여 전 참판 이남규(李南珪)와 곽 찬과의 왕복서한이 남아 있다. 그 서한에 그의 인품과 조정내외에서 그를 아끼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 그의 인품을 미루어 짐작케 하고 있다. 함께 체포된 박창로는 구변이 좋아서 곧 풀려났으나 그는 4월 12일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석방되자 다시 의진 규합에 앞장섰다. 홍주는 이미 충남 의진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어 있었다. 사방에서 의군들이 모여들었다. 일찍이 안병찬은 전 판서 민종식(閔宗植)을 끌어들여 응원을 삼고, 전 판서 최익현(崔益鉉)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자 하여 임승주(林承周) 및 여러 사람을 시켜 서로 왕래하며 일을 의논하였다. 그것은 을미년의 거사 때에 현직 관리를 포섭한 것이 실패의 주 요인이었고, 정신적 지주가 없었기 때문에 의진이 성과 없이 흩어진 것에 대한 반성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최익현은 홍주를 민종식에게 양보하고 임병찬(林炳瓚)의 건의를 받아들여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을 중심으로 활약하고자 남하하였다. 홍주의진은 1906년 4월 26일 홍주에 입성하였다. 4월 16일에 창의대장으로 민종식이 추대되고, 안병찬은 박창로·안항식(安恒植)·신복균(申復均)과 함께 참모(參謀)의 역을 담당하였다. 홍주의진은 만여 명으로 구성되어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의진이었고, 홍주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전투는 피아간에 크나큰 인명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윤 4월 9일 적군의 포위공격으로 성은 함락되고 82명 사망, 145명이 체포되는 큰 피해를 입었고 그중 80명이 경성으로 압송되는 참패를 맛보았다. 이때 안병찬은 간신히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07년 10월 1일 안병찬과 그 아우 병림(炳琳)·윤난수(尹蘭秀)·이필한(李弼漢)·조광희(趙光熙) 등 5인을 조사할 것이 있다 하여 공주(公州)로 압송하였다. 그밖에 김복한 등 홍주 의진과 관계된 인물들이 속속 붙들려 와서 심문 받았다. 이것은 민종식을 중심으로 하는 의진이 1906년 6월~10월 예산·공주 등지에서 암약한 일에 대한 간여 여부와 그후의 그들의 동정을 살펴보기 위한 수색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아우 병림은 그전에 이미 9개월간 투옥생활을 하였었기 때문에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되어 있었다. 이로써 안병찬의 3부자는 의병운동과 관련되어 모두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장서 서명(長書署名) 사건으로 또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335·336면
  • 기려수필 50·51면
  • 의병들의 항쟁(조동걸) 84면
  • 고등경찰요사 24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7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3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95·257·259~263·266·267·293~298·304·305·318· 319·332·333·33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240~242·677면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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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 대구지방법원 1919-07-29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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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충청남도 청양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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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 비 대구광역시 달서구
2 비석 파리장서 비 경상남도 거창군
3 비석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 비 서울특별시 중구
4 사당 청대사 충청남도 청양군
5 비석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전라북도 정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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