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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345
성명
한자 金祥憲
이명 裵達翁, 金達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3.1운동을 전후(前後)하여 불교계(佛敎界) 대표인 한용운(韓龍雲)보좌(補佐) 활동하고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에 가입하여 군자금(軍資金) 모집에 계속 활동하다 징역 3년형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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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경남 양산(梁山) 사람이다. 1918년 불교학교인 중앙학림(中央學林) 학생으로 민족사상 고취 및 불교연구를 목적으로 한 유심회(唯心會)를 조직하여 신상완(申尙玩)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김법린(金法麟) 정병헌(鄭秉憲)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동년 11월 한용운(韓龍雲)의 지도를 받아 민족운동 단체로 발전되었다. 1919년 2월말에 한용운의 지시로 상경하여 독립선언문 살포 등 3 1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피신하였다. 동년 8월 군자금 모집 사명을 띠고 다시 서울에 돌아와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을 조직하고 함경남도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 노동총판인 안창호에게 송금하였다. 또한 한국 지도를 구입하여 독립운동에 활용할 수 있도록 상해로 보냈다.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탐지되어 1920년 5월 체포되었으며, 1921년 3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9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87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99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8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77 26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상헌 裴達翁, 金達 경상남도 양산 경상남도 동래 3·1운동
본문
1893년 2월 1일 경상남도 양산(현 양산시)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배달옹(裵達翁)이나 김달(金達)이다. 어려서 불교에 귀의하여 부산 범어사 지방학림에서 수학한 후 1918년 불교학교인 중앙학림(中央學林)에 입학하였다. 중앙학림 시절 신상완(申尙玩)·김법린(金法麟)·정병헌(鄭秉憲) 등과 함께 유심회(唯心會)를 조직하여 불교 교리와 민족사상을 연구하였다. 항일의식은 이러한 모임을 통하여 현실적인 민족문제인 독립운동으로 귀결되었다. 한용운(韓龍雲)으로부터 지도를 받으며 호국 불교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운동에서 한용운이 불교계를 대표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할 때에 유심회의 청년 승려들은 만세 운동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1919년 2월 28일에는 서울 계동의 한용운 자택에서 김법린·신상완·백성욱 등과 함께 만세 운동 계획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때 한용운은 종교계가 독립운동의 모체로 역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후, 천도교·기독교 측과도 협의를 끝낸 지금 불교 청년의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독립선언서 1만 매를 건네주며 서울과 각 지방에 배포할 것을 지시하였다. 3월 1일, 승려 및 불교신도 1만 명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여나갔다.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식이 끝난 후 종로와 대한문을 거쳐 외국 영사관이 들어서 있는 정동거리를 지나면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서울에서 만세 시위에 참가한 후 지방으로 운동이 확산하도록 준비해나갔다. 중앙학림의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각자 범어사(梵魚寺)·해인사(海印寺)·통도사(通度寺)·동화사(桐華寺) 등의 사찰로 분산 파견되었는데, 이때 김법린과 함께 동래 범어사로 향했다. 동래에 도착하자마자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3월 4일 범어사 내의 명정학교(明正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를 조직했으며, 3월 7일 장날을 기해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만세 운동은 예정대로 일어났지만, 일제 헌병의 출동으로 시위대는 일단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월 18일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만세 시위 운동은 다시 일어났다. 일제 헌병은 이를 강압적으로 탄압하며 100여 명의 학생을 체포하였다. 동래 범어사를 중심으로 연이어 일어난 만세 시위 운동은 각 사찰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일어난 시위 운동 중 가장 활발한 것이었다. 만세 운동 후 국내 각지를 돌며 불교계 인사를 만나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였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인 안창호(安昌浩)를 만나게 되었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승려의용군 조직 임무를 부여받고, 1919년 8월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강원도단(일명 철원애국단)에서 활동하던 신승완과 연락을 취하며, 강원도·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2월 28일 함경남도 안변군(安邊郡) 문산면(文山面)에 위치한 석왕사(釋王寺)에 찾아가 주지인 김태흡(金太洽)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받았다. 이 자금은 ‘전국지도(5만분의 1)’와 함께 상하이에 있는 안창호에게 보냈다. 국내에 있는 수많은 승려를 중국 상하이로 망명시킬 계획을 하였는데, 그 중에는 유력 인사였던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추진하려고 신상완·이종욱 등과 긴밀히 연락하며,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大韓僧侶聯合會宣言書)’ 작성에도 관여하였다. 선언서에는 “일본의 통치를 배척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한다”라는 것과 이를 성취할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는 승려들의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국내 유력 승려들을 규합하던 중 1920년 4월 6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애국단에 관여한 일 등이 함께 밝혀져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었다.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아 옥살이한 후, 범어사로 돌아가 젊은 승려들에게 호국불교의 정신을 알리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5년 12월 25일 범어사에서 종무 관계로 서울을 내왕하던 도중 사고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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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정치범죄 처벌령위반, 증회,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공갈취재 징역 3년, 미결구류일수 중 10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형사부 1920-12-23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정치범 처벌령위반 공소 기각 경성복심법원형사부 1921-03-14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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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산골 유골을 화장하여 산이나 강, 바다 등에 흩뿌려 묘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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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애국선열 추모비(철원) 강원도 철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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