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1905년 서울의 광무일어학교(光武日語學校)에 들어가 2년간 수학한 뒤 1907년 가을에 종사도량형사무국(從事度量衡事務局) 통영관을 거쳐 탁지부(度支部) 세무주사(稅務主事)와 충남 서천군(徐川郡) 재무주사(財務主事)를 지냈다.
1909년 서천군 재무주사 재직중, 그는 한때 일진회(一進會)에 관계했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며 국외 망명을 결심하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금 3천여원을 사취했다가 이일이 발각됨으로써 징역 7년형을 받았다.
1915년 출옥한 이후 만주 봉천(奉天) 등지를 왕래하던 그는 1917년경부터 세계정세가 급변되면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자 독립 달성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1918년 봄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랜 동지 전 협(全協)과 결합하여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들은 독립달성을 위해서, '조선 민족의 정신 통일과 실력 양성'이 급선무라는데 뜻을 모으고 그의 실천 방안으로서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했다.
이들은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전국적 조직을 목표로 하고 활발한 조직 및 선전활동을 펴나갔다. 이때 최익환은 동단의 선전활동을 주관하면서 동단 발행의 각종 인쇄물 등을 작성·배포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그가 자금 모집을 위해 관여했던 거간(居間) 중매가 금품 사취로 되어 동년 5월 23일 일경에 붙잡혔다. 일제도 처음에 이들이 대동단과 관련된 것을 몰랐으나 조사 과정에서 대동단원으로 밝혀짐에 따라 최익환을 비롯해 선전물의 작성, 인쇄 배포에 참여했던 권태석(權泰錫)·나경섭(羅景燮)·김영철(金永喆) 등도 붙잡혔는데, 이를 보통 대동단사건이라 부른다.
이일로 그는 소위 보안법(保安法) 및 출판법(出版法) 위반죄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25년에 대동단의 동지였던 권태석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폈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될 때에는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09. 12. 9 경성공소원)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64면
- 고등경찰요사 188·189·254면
- 기려수필 267∼269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40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2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0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건 46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29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195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2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88·443∼44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