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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304
성명
한자 金國柱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광복군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43.10월 광복군(光復軍) 제3지대 입대 남경(南京)에서 서주(徐州)에 파견되어 애국 청년 포섭(愛國靑年抱攝)과 동시 서주시내 거점 확보(西州市內據點確保) 1945년 1월 4일 하류지구(河溜地區) 연락 책임자(連絡責任者)피명(被命)되어 동지 안내(同志案內)지하(地下)“루트”개척(開拓) 등 활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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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함남 원산(元山) 사람이다. 광복군 제3지대의 전신인 광복군 초모위원회 제6분처에 참여하여 기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에는 서주(徐州) 지역에 파견되어 초모공작을 전개하였으며, 서주지역 공작에서 철수한 뒤에는 중국군 제10전구산하 간부훈련학교 특설 한국광복군반(일명:韓光班)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5년 초에는 안휘성(安徽省) 하류(河溜)지구 연락책임자로 임명되어 동지들의 안내와 지하공작 거점확보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그후에는 상해 지구에 파견되어 공작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24·409·412·420·438·55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국주 - 함경남도 원산(元山) -
본문
1924년 8월 9일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만주에서 한의원을 경영하였다. 1942년 아버지를 떠나 친지가 살고 있는 중국 상구현(商邱縣)으로 가다가 조선혁명군에서 활동하던 장조민(張朝民)을 만났다. 장조민의 인솔로 이동진(李東鎭)·안경수(安慶洙) 등과 함께 중국 국부군 유격대의 안내를 받아, 1943년 8월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도착하여 한국광복군 징모 제6분처에 참여하였다. 1944년 1월 징모제6분처 주임 김학규(金學奎)로부터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 활동의 임무를 부여받고, 신송식(申松植)·전월성(全月成)과 함께 쉬저우(徐州)로 갔다. 쉬저우의 북쪽에 주둔해 있던 중국군 제4정진군(挺進軍) 유격대 사령부의 협조를 받아, 쉬저우 일대에 이주해 있는 교포를 대상으로 초모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도병으로 일본군을 탈출한 박승헌(朴承憲)을 만났으며, 그의 탈출을 도와주었다는 쉬저우 시내 희락관(喜樂館) 요정의 기생 김영실(金永實)과 연계를 맺었다. 희락관을 거점으로 교포 청년 고성부(高聖夫)와 일본군 통역 정기찬(鄭基燦) 등을 포섭하여 임명장을 수여하고, 이들에게 초모 공작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거점과 기반을 배경으로 쉬저우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의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유격대에 알리는 동시에, 일본군 내 한인 사병들에게 부근 유격대로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갈 수 있다는 선전 공작을 전개하여 많은 학도병을 탈출하도록 하였다. 1944년 11월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졸업하였다. 한국광복군 훈련반은 징모제6분처 주임 김학규가 안후이성 린취안(臨泉)에 있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에 특설한 것으로, 초모한 한인 청년들과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들을 교육 훈련시키려고 설립한 것이었다. 졸업 후 중국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한국 광복군훈련반 출신 대부분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으로 떠났지만, 윤창호(尹昌浩)·이동진(李東鎭)·조동린(趙東麟)·한성수(韓聖洙)·김우전(金祐銓) 등 12명과 함께 푸양에 남았다. 1945년 초 안후이성 하류(河溜)지구연락소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하류는 쉬저우와 난징(南京)의 중간지점에 있는 조그만 도시로, 이곳에 거점을 마련하여 초모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한국인으로 중국군 파견대장으로 복무하고 있던 김소(金沼)와 연계를 맺고 푸양으로 입대하는 한인 청년들의 후송을 맡았다. 1945년 5월 상하이(上海)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한성수(韓聖洙)가 체포되어 순국하자, 상하이에 공작 거점을 재건하고자 김진동(金鎭東)과 함께 상하이에 들어갔다. 상하이의 한인 거부(巨富)로 알려진 손창식(孫昌植)을 찾아가 공작 자금을 마련하려고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하류로 돌아왔다. 1945년 6월 30일 징모제6분처가 제3지대로 편제되면서, 제3지대 간부가 되었다. 제3지대의 적지구공작대 책임자로 임명되어 하류에서 활동하였다. 1945년 8월 하류연락소에서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들었다. 일제 패망 후 중국에 나와 있던 한인 청년들과 일본군에 있던 한인 사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확군(擴軍) 활동과 교포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특파단을 구성하여 각지로 파견할 때, 벙부지구(蚌埠地區) 특파단 단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5월 16일 총사령관 이청천(李靑天)이 광복군의 해산을 선언한 한국광복군 복원선언(復員宣言)이 발표된 후, 상하이를 떠나 국내로 귀국하였다. 1948년 8월 육군사관학교 제7기 특별반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군이 되었다. 6·25전쟁에 중대장으로 낙동강 다부동(多富洞) 전투 등에 참전하였으며, 제36사단장, 제1군수지원사령관, 1군부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1979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광복군동지회 회장, 독립기념관 이사, 제17대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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