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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302
성명
한자 金裕哲
이명 王世新, 陳國棟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광복군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40년 9월 광복군(光復軍)에 입대,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조직, 임정(臨政) 주석(主席) 경호(警護), 곤명(昆明) 등지에서 대적 선전공작(對敵宣傳工作), 한미 합작 훈련(韓美合作訓練)을 수료하는 등 활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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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황해도 안악(安岳) 사람이다. 1924년 부친 김기형(金基瀅)을 찾아 일가족이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3·1공학"에서 철저한 민족 교육을 받고 1930년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11월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군관훈련반 제3기 제17대에 입대하였다. 1936년 위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임관되어 다음해에 소주전선(蘇州戰線)에 참전하였다. 1939년 중경(重慶)에서 김 인(金仁)·이재현(李在賢)·김원영(金元英) 등과 같이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 활동하다가 1939년부터는 임시정부에서 근무하면서 김 구주석을 경호하였다.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의 창립과 동시에 광복군에 입대하여 총사령부에서 참모로 근무하였다. 그는 다음해 곤명(昆明)에서 한·일·월남·버어마 등 4개국어로 작성되고 그림을 넣은 광복군 선전전단 1백만 매를 작성하여 항공기로 수차례 최전선 및 후방에 살포하였다. 1944년에는 곤명에 있는 미 제5군사령부 특파원에 임명되어 대적 선전공작을 하였으며 또한 김철군·유재원 등 그리고 운남성 방위군과 같이 중국·버어마 국경 지대에 진출하여 광복군의 용맹성을 연합군에 보여주었다. 이 보다 앞서 1941년에는 중경에서 영국대사관 정보처와 합작공작을 하던 중 1943년 3월 안원생(安原生)과 같이 미 공군 정보장교 윔스(clarence n. weems)를 만나 미국 전략 정보처(oss)와 제휴하여 한·미 합동의 정보활동을 실시하였다. 1944년 6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총무 과장으로 임명되어 광복시까지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479·510·512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28·266·447·456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24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541·696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85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02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27·320·491·513·54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유철 김유철(金有哲), 진국동(陳國棟), 왕세신(王世新), 김유(金維) 황해도 안악(安岳) -
본문
1911년 3월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용순면龍順面 구장동九長洞에서 김기형金基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유철金有哲·진국동陳國棟·왕세신王世新·김유金維 등을 사용하였다. 아버지 김기형은 김현구金鉉九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던 독립운동가로, 임시의정원 의원·한국노병회·한국독립당 등에서 활동하였던 인물이다.1924년 아버지 김기형을 찾아 일가족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김기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황해도 경무사(警務司)로 활동하다가 1922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윤봉길 의거 직후 김구와 장제스의 교섭으로 1934년 2월 설립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洛陽)분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였다. 입교하면서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어 진국동(陳國棟)이라고 하였다. 그 해 6월 한인특별반 운영을 둘러싸고 김구·이청천(池靑天) 사이에 알력이 일어나 김구가 자신의 계열 학생들을 철수시키자, 안춘생(安椿生)·나태섭(羅泰燮)·고시복(高時福) 등 25명과 함께 난징(南京)으로 돌아왔다.1934년 8월 난징에서 김인(金仁)·노태준(盧泰俊)·안춘생·나태섭·고시복 등과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2년 동안 교육과 훈련을 받고 1936년 6월 제10기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중국군 장교가 되어 쑤저우(蘇州)전선에 투입되어,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1943년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제5공군사령부에서 편성한 대적(對敵) 선전공작대에서 활동하였다. 대적 선전공작대는 한국·미국·중국의 합작으로 편성되었고, 한국인으로는 중국 공군에 복무하고 있던 장성철(張聖哲)·김좌경(金佐卿), 중국 육군에 복무하고 있던 김철군(金鐵軍)·유재원(柳在元), 윈난비행장에 근무하고 있던 염온동(廉溫東) 등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대적 선전공작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쿤밍방송국을 통하여 한국어와 일본어로 대적방송을 실시하였고, 다른 하나는 한국·일본·월남·버마 등 4개 국어로 전단을 작성하여 적후방에 살포하는 것이었다. 주로 선전공작에서 전단 삽입하는 그림을 고안해 그려 넣는 작업을 하였다. 때로는 김철군·유재원 등과 윈난성 방위군과 함께 중국과 미얀마의 국경지역에 진출하여 최전방에서 대적선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1944년 겨울부터 충칭에 있는 주중 미국대사관의 한인공작반(Korean Group)에서 활동하였다. 한인공작반은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이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 미군을 위한 정보수집을 제의하여 설치된 것이다. 안우생(安偶生)·엄도해(嚴道海)·송면수(宋冕秀)·진춘호(陳春浩)·안병무(安炳武)·박영만(朴英晩) 등과 함께, 일본과 한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잡지 등의 출판물과 뉴스방송·전보 등을 통해 정보수집과 적문서 번역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1944년 6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총무과장에 임명되어 1945년 3월까지 근무하였다.광복 후 중국에 이주해 있거나 일본군에 있던 한인청년들을 한국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확군(擴軍)사업이 추진되자, 난징에서 확군활동을 벌였다. 1945년 10월 난징잠편지대(南京暫編支隊)가 편성되었을 때, 지대장 안춘생(安椿生) 휘하에서 진춘호·신영묵(申榮默)·문응국(文應國) 등과 참모로 활동하였다. 1946년 3월까지 난징에서 활동하다가 상해로 와서, 6월 23일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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