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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272
성명
한자 朴寧熙
이명 朴斗熙, 朴寧燮, 朴章燮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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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77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20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5년 조국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도만(渡滿) 신흥사관학교(新興士官學校) 교관,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중심인물로 활약, 1920년 독립군총사령(獨立軍總司令)부관(副官)으로 청산리 대첩(靑山里大捷)에 공훈, 노령(露領)에 가서 무기 구입, 1922년 신민부(新民府)보안사령(保安司令)으로 민병제(民兵制) 실시, 출전대기 훈련(出戰待機訓練), 계몽사업, 군인의 질적향상을 위하여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여 청년군인 500여명을 양성하는 등 1930년 공산당원(共産黨員)에게 살해당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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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재학하다가 1915년 조국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은사인 이시영(李始榮)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조국광복은 강력한 무력투쟁에 의하여 성취될 수 있다는 신념하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교하여 수학하고 졸업과 동시에 모교의 교관과 학도감으로 일하였다.

1919년 8월 7일 정의단(正義團)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임전태세의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할 때에는 서 일(徐一)·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계 화(桂和)·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圭植)·이범석(李範奭) 등과 같이 주요 간부로서 참여하였다.

한편 북로군정서에서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에 설치한 사관연성소의 학도단장을 맡아 사관생도를 모집, 단기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20년 8월에는 사령관 김좌진의 부관으로서 일하였다.

1920년 10월 18일 일본군 3개대대가 무산(茂山)에서부터 북로군정서를 습격하고자 진출하자, 군정서에서는 청산리 백운평(靑山里白雲坪) 전방 삼림전투에 유리한 지점에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근대를 임전 조직으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그는 김좌진의 부관으로서 청산리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독립전쟁사상 미증유의 대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전쟁 이후에는 일군의 추격을 피하여 노령으로 이동하였으나 1922년 6월에 자유시참변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4년 1월에는 총재 이범윤(李範允)을 중심으로 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에 가입, 김좌진·신일헌(申日憲)·한함산(韓咸山)·최대갑(崔大甲)·조생갑(趙生甲)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강화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북로군정서 진영을 재정비 조직하게됨에 따라 행정부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25년 3월 영안(寧安)에서 김좌진·김 혁(金赫) 등이 중심이 되어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할 때 김좌진·남성극(南星極)·최 호(崔灝)·유 현(劉賢) 등과 같이 대한독립군단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신민부의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사활동에 주력하였다.

또한 신민부에서 목릉현 소추풍(穆陵縣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연 2기(期)의 속성군사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그는 백종열(白鍾烈)과 함께 교관으로서 생도들의 군사교육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신민부에서 항일운동의 협조를 받기 위해서 소련과의 교섭을 위하여 그를 공산당 극동본부가 있는 블라디보스톡에 파견하였는데 1927년 게빼우에 체포되어 1930년 고루지게에서 피살되었다고 한다. 일경 정보기록에 의하면 1932년 1월 본적지의 친척형이 노령 모스크바로부터 서신을 받았다고도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10·323·324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9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967·1052·1054·1063·1078·1082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73면
  • 고등경찰요사 120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546면
  • 신민부약사 9·1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54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62·772·779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79·86·107·10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3권 383·396·508면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묵구) 252·26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75·180·181·364·366·368·384·450·453·509·514·515·52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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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영희 아호 : 정헌(靜軒)·검추(劍秋)·금추(琴秋), 이명 : 박두희(朴斗熙)·박영섭(朴寧燮)·박초섭(朴草燮) 충남 부여(扶餘) 신흥무관학교,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신민부
본문
1896년 12월 28일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은산면(恩山面) 가곡리(佳谷里)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정헌(靜軒)·검추(劍秋)·금추(琴秋)이고, 이명은 박두희(朴斗熙)·박영섭(朴寧燮)·박초섭(朴草燮)이다. 서울의 휘문의숙(徽文義塾)을 나왔고, 지린성(吉林省) 퉁화현(通化縣) 허니허(哈泥河)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초등군사반에서 정식 군사교육을 받았다.1919년 만세운동 이후 김좌진(金佐鎭)은 서로군정서측에 북로군정서의 단기 사관학교인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의 교관으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과 졸업생을 요청하였다. 이때 김춘식(金春植)·오상세(吳祥世)·백종렬(白鍾烈)·강화린(姜化麟)·최해(崔海)·이운강(李雲崗) 등과 함께 파견되었다. 1920년 3월 지린성 왕칭현(汪淸縣) 씨다오포(西大坡)의 사관연성소가 개교할 때부터 학도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김좌진 사령관을 보좌하는 사령부 부관 임무도 겸임하였다.독립군의 무장활동이 강화되자, 일제는 1920년 8월 이른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우고, 9월에 마적을 사주하여 훈춘(琿春)에 있던 일본영사관을 공격하게 하였다(훈춘사건). 일제는 이를 빌미로 그 해 10월 일본군 2만여 명을 동원하여 서북간도의 독립군을 탄압하는 한편, 독립군의 인적·물적 기반인 한인 마을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백두산 일대의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추격해 오는 일본군과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지린성 허룽현(和龍縣) 싼다오거우(三道溝) 청산리(靑山里) 일대에서 큰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북로군정서 사령부의 부관으로 직접 참전하여 승리를 이끌었다.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에서 승리한 독립군은 역량을 보존하고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북만주로 이동하였다. 북만주로 이동하던 독립군은 1920년 12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미샨현(密山縣)에 도착하여 서일(徐一)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제1여단의 참모로 선임되었다.1921년 1월경 독립군은 러시아의 이만(伊滿, 달레네친스크, Dalnerechensk)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독립군 사이에서 볼셰비키혁명세력이 독립군을 후원할 수 있다는 입장과 원조할 조건이 안 된다는 두 입장으로 갈린 것이다. 김좌진 등과 함께 후자의 입장에서 러시아의 스보보드니(自由市)로 이동하지 않고 북만주로 돌아왔다.1922년 8월 북만주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둥닝현(東寧縣)을 중심으로 쑤이펀허(綏芬河)에서 하얼빈(哈爾濱)을 잇는 중동철도를 따라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현지의 한인 사회와 마찰이 일어났다. 이에 1922년 말 무링현(穆棱縣) 마치아오허(馬橋河)에서 지방 관헌에게 무장을 해제당하였다. 1924년 3월 동빈현(同賓縣)에서 북로군정서를 재건하려는 김규식(金奎植) 등의 주도로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 결성되자 이에 동참하여 행정부장에 취임하였다.1925년 3월 10일부터 닝안현(寧安縣)의 닝안현성 내에서 북만주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기 위한 창립대회가 열렸을 때, 대한독립군단 대표 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 창립대회에서는 “우리들은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각 단체의 이름을 취소하고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여 “국가의 건설과 민중의 철저한 해방을 도모하기 위하여 강권 폭력의 침략주의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더욱 일보를 전진하여 우리들과 동일한 지위에 있는 세계 민중과 협동 동작을 취하겠다.”는 「선포문」을 발표하였다. 창립대회에서 김혁(金赫)을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하는 등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보안총지휘 겸 보안사령관을 맡았다. 신민부에서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우자 교관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런데 신민부는 군사 활동에 우선을 두려는 세력과 북만주 조선인의 생활안정을 위해 자치 활동에 우선을 두려는 세력 사이에 마찰이 계속되었다. 흔히 전자를 군정파, 후자를 민정파라 불렀다. 두 세력은 합의를 보지 못하고 1927년 12월 총회를 계기로 따로따로 신민부 집행부를 결성할 때, 김좌진이 이끄는 군정파에 가담하였다. 두 정파는 1928년 들어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같은 해 10월 빈주사건(賓洲事件, 의무금을 징수하려는 신민부 군정파 소속 보안대의 무력 행동에 반발하는 주민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격렬하게 대립하였다.1928년 민족유일당 결성운동이 좌절된 이후 만주지역의 민족운동 세력 내부에서는 좌우대결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29년 사회주의운동 세력이 민족주의운동 세력을 개량주의로 공격하면서, 만주지역에서의 좌우대결은 살상을 일으킬 정도로 경직된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1930년 1월 김좌진이 사회주의자에게 암살당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해 암살당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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