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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170
성명
한자 金書鍾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 1916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후 대종교(大倧敎) 총본사(總本司)의 중진으로 독립정신 고취와 민족의식 교화활동 중 윤세부(尹世復) 등 20여명과 함께 피체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문일민(文一民)) 86면 확인]

2. 1943.8.27 일경(日警)의 고문으로 만주(滿洲) 목단강(牧丹江) 액하형무소(掖河刑務所)에서 옥사(獄死) 순국(殉國)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보훈처(報勳處)) 제8권 761,796,800, 802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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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6년 8월 15일 대종교 제1세 교주 나홍암(羅弘岩)이 교(敎)와 나라를 위하여 구월산 삼성사(九月山三聖祠)에서 순교할 때 김두봉(金枓奉)·엄주천(嚴柱天)·안영중(安英中)·나주영(羅宙永)·나정수(羅正綬)와 그가 유서와 유명을 함께 봉승(奉承)하였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의 재건 및 독립운동지원 활동을 하였다.

1934년에는 하얼빈(哈爾濱)시로 나가 김응두(金應斗)·박관해(朴觀海)·김영숙(金永肅) 등의 협조를 얻어 하얼빈시 안평가(安平街)에서 대종교 하얼빈 선도회 총무로서 교포들로 하여금 대종교 교당을 찾아 단군성조의 위덕을 추모하면서 민족정신을 가다듬게 하였다.

1942년 11월 19일 일제의 대종교 간부 일제 검속에 따라 교주 윤세복(尹世復)이하 간부 최 관(崔冠)·이재유(李在 )·이 정(李楨)·권상익(權相益)·나정련(羅正練)·오근태(吳根泰) 등 20여명과 함께 그도 체포되었으며, 악랄한 고문 끝에 1943년 8월 27일 목단강성(牧丹江省) 액하(掖河) 형무소에서 옥사하여 대종교 '순교 10현(殉敎十賢)'중 1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8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761·796·800·80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서종 호 : 설도(雪島) 경상남도 함안(咸安) 임오교변
본문
1893년 6월 13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칠원면(漆原面) 구성리(龜城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설도(雪島)이며, 종교는 대종교(大倧敎)이다.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의 보흥학교(普興學校, 현 칠원초등학교(漆原初等學校))를 졸업하였고, 이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현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였다. 한편, 1909년 1월 15일 나철(羅喆)에 의해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가 창시되자 1915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던 당시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대종교의 교인은 참교(參敎)·지교(知敎)·상교(尙敎)·정교(正敎)·사교(司敎) 등 5단계의 교질(敎秩)로 구분되는데, 1916년에 참교로 선발되었다. 일제는 191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령 83호 「포교규칙(布敎規則)」 개정안을 발표하여 신도(神道), 불교,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포교할 경우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의무화하였다. 대종교 측은 12월 21일 「포교규칙」에 의거하여 대종교가 한국의 신도에 해당한다는 내용의 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조선총독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대종교의 포교가 불법화되자 분개한 나철은 1916년 8월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로 향하여 8월 15일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이때 동행하여 고인의 유지를 받들었다. 이후 서울의 양원여학교(養源女學校)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다. 이 학교는 1920년 7월 16일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 현 동덕여자고등학교(同德女子高等學校))에 합병되었다. 또한 영남 지역의 동지들과 뜻을 모아 영우저축회(嶺友貯蓄會)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4년 개편된 대종교의 교구 조직인 동도본사(東道本司, 동만주·노령·연해주·함경도), 서도본사(西道本司, 남만주·중국·몽골·평안도), 남도본사(南道本司, 전라도·경상도·강원도·충청도·황해도), 북도본사(北道本司, 북만주·헤이룽장성(黑龍江省)) 등이 교세 확장으로 1922년 3월 5일 교구분리조례(敎區分理條例)를 통해 재편되자 북만주 지역에 해당하는 북일도본사(北一道本司)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상교로 승진되어 40세인 1934년 만주 빈장성(濱江省) 우창시엔(五常縣)에서 농장을 경영하였고, 만주 헤이룽장성 하얼빈시(哈爾濱市)에서 북만농구공사(北滿農具公司)의 사장으로 취임하여 사업가로 활약하였다. 또한 하얼빈시 안평가(安平街)에서 대종교 하얼빈 선도회(宣道會)를 조직하고 그곳의 총무를 맡으며 대종교 포교에 앞장섰다. 이후 대종교에서 경의원(經議院) 참의(參議),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942년 10월 3일 단군을 모시는 천전(天殿)을 세우고자 천전건축주비회(天殿建築籌備會)가 결성될 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19일 국내 및 만주 지역의 대종교 간부진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는 임오교변(壬午敎變)이 발생하였다. 일제의 대종교 간부 일제 검속에 따라 교주인 윤세복(尹世復) 등 2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후 만주 헤이룽장성 닝안현(寧安縣) 경무과(警務科)로 압송되어 4개월간 악형을 당하였다. 1943년 3월 말경에는 헤이룽장성 무단장(牡丹江) 액하(掖河) 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이곳에서 8월 27일 사망하였다. 이후 대종교에서 순교십현(殉敎十賢)으로 추존될 때 그의 이름이 포함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기도 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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